소설가 김재찬

초록의 바다였다. 초록 일렁임의 바다가 나를 불렀다. 시도 때도 없이 툭하면 바다가 나를 불렀다. 바다가 부른다고 언제든 바다로 달려갈 수 있는 삶이 몇이나 될까. 바다가 부르면 두 손바닥으로 귀를 막아야 했다. 귀를 막으면 바다는 내 콧속으로 흘러들어오고, 내 망막을 시퍼런 물로 뒤덮었다.
한 세상 숨죽이고 사는 이들의 속내를 바다는 정말로 소리 내어 철썩이는 것일까? 쉽게 바다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은, 바다가 대신 철썩이는 그 절망적인 리듬을 정말로 알고 있는 것일까? 자나 깨나 철썩거리는 단순한 파도소리가 이렇듯 비장한 것은, 무의도 바람에 한 많은 뼈를 묻은 한 무희(舞姬)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밀려가고 밀려오는 파도소리 속에서 밀어내고 끌어안는 바다를 버리지 못하는 숙명. 벌써 시계바늘이 12시에 매달리고 큰 바늘은 황소걸음으로 작은 시침 앞에 무겁게 멈춰 섰다.

지긋이 눈을 감고 다혜와의 어슬펐던 첫 키스를 떠 올렸다.
“음, 첫 키스는 어떤 의미일까…“
종강을 앞둔 캠퍼스 늦은 밤, 강의실에서 다혜의 입술에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이와 오래 떨어져야 하는 것을 슬퍼하는 연인의 에로틱한 키스가 아니었다. 가족과 함께 한 달간 미국으로 겨울 여행을 떠나는 애인에게 젊은 남자라면 으레 해야 할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거칠게 퍼부은 뜨거운 입맞춤에 대해 비난조로 그녀가 말한 것은 당연했고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키스는 단지 환상에 불과 했다. 다혜는 멋진 키스야 말로 멋진 남자가 뜨겁게 빚는 사랑 행위의 전부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한 남자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공을 들여서 하는 것. 대단히 미적인 감각으로 섬세하게 하는 것. 언제 입을 벌리고, 언제 떨어져야 하는지, 어떻게 가볍게 스쳐야하는지 알고 싶었다.
멋지게 키스를 하려면 힘과 호흡을 잘 조절하고 입술근처에서 하는 것과 귀와 목덜미를 하는 것을 조화롭게 이끌어야 했다.
그녀의 첫 경험은 지나친 초조감으로 너무 촉촉했고 뻣뻣했다.
“키스는 옷을 벗기는 일의 전주곡으로 야심에 찬 목적물을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예의 바른 일로 일단 둘이 침대에 들어서면 또 다른 열정에 노력을 퍼붓는 것…”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흰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워 내리 십여 곡의 샹송을 들으며 깊은 아침잠에서 깨었다. 무엇인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거짓 없는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양파껍질 같은 가면의 옷을 하나씩 벗겨가는 과정일 거야…
나름의 정의를 해보곤 했다.
“나에게서 물맛을 빼앗고 사랑을 정복하는 맛 까지 앗아 갔어…”
눈을 뜨면 늘 침대에서 어김없이 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었다.
마치 침대가 쇠락한 몸을 부축하는 목발처럼 느껴졌다.
“달의 몰락…”
자신을 기울어가는 달의 몰락이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겁먹은 사람들과 달팽이 속의 고독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언제나 미친짓이다. 미친짓이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환상과 같은 검은 그림자로 나를 찾아오는 괴물이다…, 그런데 나는 우유부단하다.

당신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벌써 당신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코에 모이는 비잔티움의 잔금들이 아주 불확실합니다. 어쩌면 나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을 내 눈알을 손으로 눌러서, 당신을 제2의 당신으로 만들기 때문에 내 의식이 당신과 만나는 감각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카시아향과 같은 표정, 바다안개와 같은 체취, 가장 당신다운 흰 불라우스를 입은 당신의 인상을 오래 간직하길 바랍니다.
침상에서의 망상은 끝이 없었다.
저 미세한 우주의 파동, 만물의 흉상, 기괴한 존재들, 공포 그리고 유령들과 마주쳤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과 이상 속에서 괴물과 보냈어…, 땀을 흥건히 흘리며 깨어나는 낮잠 속에서 만나는 몽달귀신, 어두컴컴한 학교 화장실에서 봤다고 지레 놀라는 달걀귀신, 벌건 대낮에 백일몽으로 찾아오는 엽기동물이 내 뇌 속에서 세포 증식해왔어…, 뒤죽박죽 제멋대로 돌아치는 그 창조물은 놀랍게도 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어. 미래는 이미 과거 속에 시간의 괴물이 되어 속빈 내 마음에 자리했어…

오늘도 궁상스레 침대에서 무겁게 눈을 떴다.
어제 밤에는 소주와 양주를 봉준이와 마셨는데 양주 두병쯤 마신 봉준이는 침대에 눕자마자 눈을 감았고, 나는 봉준이 옷을 벗겨주어야 했다.
멋대로 벗어놓은 채 양말과 셔츠가 침대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봉준이는 꽤나 곤히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골며 아직도 깨어날 줄 몰랐다.
강렬한 봉준이의 표정은 나의 예술에 영구불변의 주제가 되었다. 봉준이의 어눅한 모습, 미소, 적막한 순수의 표정들. 어떤 위기에도 그 자신의 고정된 모습을 바꾸지 않는 봉준이었다. 
인간은 외로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가족이나 친구 혹은 연인을 간절히 바란다.
친구.
그러나 나는 이 친구에 대해서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그것이 훗날, 나의 가장 진실한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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