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지혜인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밖에서 찾지 않고 내 안에서 찾는 사람이다.’
‘지혜인은 삶의 좌표와 신념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다.’

스님과의 인연은 묘했다.
내가 내민 사회 첫발은 기자였다. 딴따라기자라 해도 지켜야할 것은 지켜야 한다. 기자에게 오보란 있어선 안 되지만 게을러서, 혹은 취재원에게 접근하기 어려워서 진실과 조우하지 못한 경우는 그나마 용서할 수 있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아닌 줄 알면서 이를 확대하고 소문을 재생산하는 것은 최대 오보 중에 하나다.
기자란 항상 무식한 족속이며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상일을 죄 아는 것처럼 매일 쓰고 말하고 잘난 척하며 다니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이 평소 몰랐던 것을 새삼 발견하거나 깨닫고 나서야 뒤늦게 남에게 옮기는 일이 고작이 아니겠는가.
그때 나는 석가탄신일을 기념하여 법우 스님을 취재케 되었다. 마치 나에겐 신대륙 발견 같은 대 발견이었다. 아예 이런 세상이 있었다는 것조차 몰랐거나 터무니없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취재의 주제는 ‘세상 은둔 수행의 삶’이었다.
새롭게 전개되고 있는 한국의 불교철학이 혼돈 속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을 정리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한된 여건 속이나마 여러 사람을 만났고 나름대로 궁금증들을 해소하느라 이 얘기 저 얘기를 물어보면서 사방을 쏘다녔다. 그러나 많은 한계를 절감케 되었고 스님은 나에게 크나큰 경각심을 주었다.

숨 막히는 무채색 아스팔트도 찌는 듯한 무더위도 시린 아픔 역시 그 속에 파묻힐 거라는 믿음에 갸우뚱 고개 젓는 법우 스님께 나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인생 참으로 복잡합니다.”
‘회사가 있는 광화문 건물로 들어가는 발아래의 세계는 싫다’고. ‘일등석에 앉은 들뜬 기분으로 내 청춘을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고.
더없이 행복하였으나 하염없이 내 욕구를 충족키 위해 소비되는 서울에서의 생활. 나는 ‘그 시간에 대해 부채(負債)를 예술로 떨치고 싶다’고 했다.
어느 화창했던 날, 다시 회사대신 절간으로 걸어갔다.
펜과 원고지를 사고 양복과 넥타이를 내던졌다. 그 뒤 다시 회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청춘의 치기로 치부해 버리기엔 너무나 큰 결단이었다. 왜 그랬을까.
꿈처럼 좋기도 했고 꿈처럼 허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휘몰아치듯 달렸다. 

스승님, 이렇게 불러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울림이 있다. 구체적인 대상이 없어도 스승님이라는 단어는 내게 설렘을 남긴다. 그것은 스승이라는 말 속에는 이미 존경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내 최초의 꿈과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스님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어느 해 초가을 스님은 인도로 훌쩍 떠나셨다. 스님이 가시는 것을 뒤 늦게 서야 알게 되었다. 스님이 가시는 날, 나는 산 계곡에서 스님의 짐을 실은 짐차가 저편을 휘돌아 지나칠 때 나도 모르게 서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나는 멀어져 가는 짐차를 바라보며 왕방울 같은 눈물을 한손으로 가린 채 한손으로는 안녕히 가시라고 손을 혼들었다.

내게 처음으로 꿈을 일깨워주고 떠난 스님.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은 내 최초의 스승이었어. 스님의 삶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면 수행자로서의 내 모습은 한없는 부끄러움이었어. 거울과도 같은 그분의 삶에서 나는 수행자의 위엄과 의연함이 가득 채워진 마음과 길을 보게 되었어. 그 길은 곧고, 맑고 진실해 탁한 마음으로는 그리고 욕망에 무거워진 발걸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언젠가 스님을 모시고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울컥한 기운으로 치솟은 설악 기봉들과 암벽, 칼칼한 이 땅 들녘의 절박한 풍경, 밭길 사이 허위허위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행은 몇날 며칠을 그 분 곁에 머무르는 시간을 내게 주었다. 가까이 하면 존경의 마음이 흐려지는 것이 대개의 경우이지만 그분에게는 그러함이 전혀 없었다. 반대로 나는 여행을 하면서 존경의 마음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옆 방 너머까지 들려오던 독경소리. 언제나 잠결에 소리를 들으며 노 수행자가 그려내는 수행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가까이서 그를 오래 지켜 본 사람들은 일면 그를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철두철미한 성향과 원칙에 입각한 평소 그의 생활모습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할 철옹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리라. 거친 풍랑을 이겨내지 않은 자, 어찌 바다를 정복했다 할 수 있을까. 삶의 한 복판에서 가부득감부득(加不得減不得) 마땅한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입신(立身)한 법우 승님이었다.
한 인간의 삶에 편리와 안락이라는 사랑의 가교를 마련해준 그의 평생이 나에게 진정한 귀감이 되었다.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은 끝까지 함께 하지만, 이는 정직과 성실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어겼을 때는 가차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에도 용서란 없다. 귀를 현혹시키는 달콤한 소리는 하지 않은 만 못한 법, 의미 없는 허튼소리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법우 스님 영향으로 나의 문학은 한과 불교가 어우러져 독특한 카테고리를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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