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사라져 가는 풍경들

01 귀향

                   ▲장승현 작가.
                   ▲장승현 작가.

어머니가 1남 6녀를 홀로 키우시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남의 식당 일을 다니며 7남매를 다 키우기까지는 억척같은 어머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고향은 연기군 서면 고복리로 빈농의 식구들이 그나마 의지하고 살았던 집도 고복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실향민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우린 대전에서 10여 년 전부터 어렵게 영세민 아파트를 얻어 살아 왔다. 
아내와 아들 둘, 그리고 어머니, 외할머니, 그리고 아직 시집 안 간 여동생 둘, 이렇게 여덟 명이 13평짜리 좁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이건 집이 아니라 닭장 같은 수용소였다. 
서로 집이 좁다 보니 서로 살 부대끼고, 사람들이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짜증만 부렸다. 

도심에서 20여 년을 살다보니 싫증이 나기도 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복잡한 생활을 할까? 
집이 좁아 큰 아파트로 이사를 가든지 어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난 새로운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시골에 가서 살자. 복잡한 도심보다 공기 좋고 복잡하지 않은 시골에서 다시 정착을 해보자. 

그러나 여동생들은 대출을 받아 좀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자고 했다. 자기들이 얼마를 보탠다고 했다. 
그럴 거면 우리 시골 가서 집을 멋지게 짓고 살자, 내가 목수 기술이 있으니 땅만 사면 되지 않겠냐? 그렇게 설득하며 난 고향에 땅을 알아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결성 장씨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 종중 땅이 나온 게 하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일거리 없는 겨울에 공사에 들어갔다. 내가 목조주택 기술이 있으니 잡부 하나를 데리고 겨울 내내 공사를 했다. 일하다 돈이 떨어지면 쉬고, 대전 나가 돈 벌어다 또 시작하고, 일거리 생기면 거기 다녀와서 다시 짓고, 그러다 보니 거의 서너 달이나 걸렸다.

새로 지은 목조주택은 대지만 180평에 건평만 45평이었다.
화장실도 두 개고, 방은 5개에 거실만 10평이 넘었다. 거실만 해도 대전에 살던 아파트 크기만 했다.
일곱 살 난 큰애와 네 살 난 작은놈이 집을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운동장처럼 큰 공간을 한없이 뛰어다녔다. 

대전에서는 애가 폐쇄공포증이 있어서 엘리베이터도 혼자 타지 못했는데 여기서는 강아지와 중캐도 목을 비틀 정도로 담대해졌다. 

마당엔 잔디를 심고, 가운데 넓적한 돌을 깔아 징검다리처럼 만들었다. 출입구에 돌을 쌓아 만들었고, 계단도 이쁘게 꾸몄다. 마당 한가운데는 백합도 심고 연산홍, 단풍나무 등 몇 가지 나무도 심어놓았다.

이사 오고부터는 식구들 얼굴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영세민 아파트에서 살 때는 식구들 얼굴이 항상 활짝 피지를 못하고 있었는데 엄마도 이사 오고부터는 여유 

있는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큰일 때가 되면 7남매가 다 모여도 걱정거리가 없게 되었다.
대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 때는 전쟁터였다. 

7남매 되는 형제들이 칼잠을 잤고 어린 조카들이 날뛰면 아수라장이었다. 우리 7남매가 모두 모이면 부부와 자식들까지 합쳐 모두 22명이나 된다. 

이제는 7남매 식구들이 다 모여도 집이 널널해 어디에 처박혀 잠을 자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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