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선교사, 칼 귀츨라프!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고대도는 충남 대천항에서 약 50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예로부터 마을이 형성된 집터들이 많이 남아 있다해 고대도(古代島)라 불려 왔다고 한다. 
면적이 0.82㎢에 불과한 이 섬에는 약 60여 가구의 섬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는데 예로부터 내려온 토속신앙이 강한 곳이었다. 

영적으로 척박하기만 했던 이 섬을 독일인 개신교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지금으로부터 190년 전에, 복음 들고 왔던, 선교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물론 지금은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로는, 성지 순례자들과 일반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자주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섬에 귀츨라프 선교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에는,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기록된 공적비(功績碑)가 있어, 오고가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렇다! 그의 선교는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보다 53년이나 앞서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조선에서 입국을 허락하지 않아, 이 섬에서만 고작 20일 동안 머물다 떠났던 선교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독일 출신으로 기독교 가정의 외아들로 출생해 베를린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동양선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으로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 중국에서 독립선교사로 활동했다.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로 방콕에서 태국어로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하는 등 언어에 천재성을 가진 귀츨라프는 본국어인 독일어와 영어 화란어. 태국어. 중국어. 일어에도 능통해서 이들의 언어로 저술하고 번역 활동을 하였다.

1831년 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아내는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태아와 함께 눈을 감았는데, 이 광경을 홀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는 가족을 잃은 큰 슬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열정을 멈출 수 없어, 중국 연안을 다니며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마카오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용선계약인 507톤의 범선 로드 에머스토호에 의사. 통역관자격으로 동승하여 조선을 찾아, 통상을 요청한 최초의 선박과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해 7월 25일 고대도에 도착한 그는 고대도 관할의 홍주목사 이민희를 비롯한 관리들을 만나, 통상을 청원하는 서찰과 국왕선조에게 진상품으로 지도, 천문 과학도서, 모직물, 망원경, 유리그릇, 한문으로 된 신구약완역성경, 신천성서(神天聖書)등 26종의 서적을 전달하며 통상을 요청하고, 조정에서 회신(回信)이 올 때까지 머물며, 고대도를 거점으로 원산도와 내륙까지 선교를 하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빈궁(貧窮)한 주민들의 삶을 목격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감자 파종 재배법, 야생포도 생산과 포도즙 재배법, 60명의 주민들에게 감기 치료약을 나누어 주며 서양 의술을 베풀었다.

그는 또한 한글자모를 익혀 한글로 주기도문을 번역해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했지만 조정에서 외국과의 통상을 불허해 부득이 고대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후 8월 17일에는 제주도 연안에 도착하여 일본, 조선, 중국 만주를 잇는 동아시아를 선교 거점으로, 제주도의 선교역할을 기술하였다. 

특히 그는 1832년 11월 ‘중국의 보고’라는 잡지에 한글에 대한 소고(小考)를 발표하여, 한글을 세계에 최초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 척박한 땅에 최초로 복음을 들고 왔던, 칼 귀츨라프 선교사는 동북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1851년 48세의 나이로 홍콩에서 생을 마치고, 홍콩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그의 생은 오직 예수의 삶이었기에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회자(膾炙)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예수님의 이야기를 써놓고 갔듯이, 세종시에서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기독교인들이 있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진리와 순교의 동산, 조치원 성결교회(담임 최명덕 목사)의 성도들 중에, 남달리 헌신과 봉사를 잘하고 있는 신실(信實)한 부부(夫婦)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부인인, 박양옥 권사가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 부인은 담임목사와 남편에게, 베트남에서도 가장 오지(奧地)의 땅에다가, 교회를 하나 세우고 싶으니, 알아봐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의 남편은 부인의 유언(遺言)을 받들기라도 하듯, 현지를 오가며 반군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위험한 국경지역에 ‘부누이’ 교회를 건축 중이었는데 준공을 얼마 앞두고, 그 부인은 회생(回生)하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교회 건물은 3년 전에 완공되었음에도 코로나로 인하여 헌당예배를 드리러 갈 수 없다가 다행히 요즘 상황이 안정돼 지난 10월 30일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비롯하여 그의 남편, 그리고 까라혼교회, 닥스교회, 부켈교회, 씨알하이교회를 건축할 수 있도록 후원했던 성도들이 함께 동행을 해 주었다. 

특히, 이날 남편은 부인을 만나러 가는 듯한, 설레임이 커서였을까! 

아웃리치 팀원중의 한사람이, 우리와 현지인들 간의 문화차이로 인하여, 너무 울거나 자세가 흐트러지는 행위는 반감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 자제해야 된다고 권하자, 울기는 왜 울어 나는 교회에 가서 울리도 없고, 그런 일은 더구나 없을 것이라고 약속이라도 하듯, 서로 다짐을 하였다는 것이다. 

드디어 베트남에 도착하여 ‘부누회’ 교회에서 입당예배를 드리기 위해, 단상에 올라와 찬양을 하는 순간, 그는 감동이 북받쳤던지, 자신도 모르게 참고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그의 흐느낌은 오랫동안 이어지며, 함께한 일행들은 더 이상 찬양을 부르지 못하고, 모두가 어깨만 들먹이고 있을 때, 갑자기 현지인들 여러명이, 위로의 박수를 쳐주었고, 결국 일행들 모두가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는 선교보고(宣敎報告)에, 앞뒤 좌우 가릴 것 없이 눈시울을 적시는, 한편의 감동 드라마가 연출되기도 하였다. 

그렇다! 그의 남편, 윤철원 권사는 베트남의 ‘부누이’ 교회를 통해서, 다시 화려한 꽃으로 부활한, 자기부인의 모습을 보고 돌아 왔다는 간증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이날 담임목사는, 누구든 죽음을 피해 갈 수는 없기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고 권면(勸勉)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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