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박정환은 궁정동 안가를 만들기 전에는 위장번호를 단 승용차로 밤나들이를 하곤 했다. 

당시에는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시간과 장소를 아는 비밀에 속했다. 

육영수 여사는 별도의 정보망으로 야행을 감시, 꼬투리가 잡히면 경호실장에게 따지고 심한 부부싸움을 했다. 그러나 모두가 못 본체 모른체 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정계 관계자들과 연예인 사이에서 ‘매춘’이라기 보다는 주로 ‘상납’ 차원에서 이뤄졌다. 
최은희는 삶의 질곡이 평탄치 않은 등 개인적으론 참 불운한 인물이었다. 홍콩에서 북한으로 밀입국한 이유도 박정환 때문이다. 

안양예고 교장 재직 시절, 박정환이 여고생 상납이 끊이지 않고 요구하자 처음엔 어쩔 수 없이 몇 차례 응했으나 나중엔 맞서다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결국 밀출입국한 것이다. 

윤정희는 재계 관계자에 이어 70년대 초반까지 박정환과 깊은 관계였다. 
육영수 여사가 이를 알고 자주 부부싸움을 벌이기도 했고 박정환이 재떨이를 집어 던져 육영수 여사의 얼굴이 멍이 들어 육영수 여사가 한동안 대외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다. 윤정희가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 부랴부랴 프랑스 파리로 떠난 것도 육영수 여사가 보낸 것이다.  

최은희의 남편 신상옥 감독이 겁도 없이 전태일 분신 사건을 영화로 찍겠다고 다닌 것에 당연히 화를 낸 박정환. 

독재정권은 신상옥의 영화촬영을 방해하고 여기에 화가 난 신상옥은 1975년 장미와 들개라는 자신의 영화에서 검열삭제 당한 노수미의 상반신 노출 장면을 예고편에 집어넣는 반항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상옥의 영화사 ‘신필름’의 인가를 취소당했다. 
신상옥이 여기에 행정소송을 냈다가 중앙정보부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결국 행정소송은 취하되고 최은희가 납북되는 계기인 안양예고를 다른 사람 아닌 신상옥이 이사장인 학교였으나,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어려움 까지 겪었던 정치적 외압의 영향으로 인한 납북보다 밀입국설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다.  
  
개헌반대 시위가 열리자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불법으로 연임 제한 횟수를 2회에서 3회로 늘리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박정환은 자신이 독재자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내가 반민주주의 독재자로 여겨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저랑 비슷하세요. 지치는 게 참 서글픈데, 그 서글픔의 대상이 내 부모님이란 사실이 너무 아파예.”
“당시, 김일성을 능가하는 박정환 미화로 이루어진 국정교과서로 교육시킨 여파라고 할 수있지.”
“거기다가, 동아일보 탄압, 경향신문/MBC 경영권 육영재단에 흡수, 60년대 후반 KBS 방송 통폐합 등…, 언론을 통한 대국민 세뇌교육의 결과라고 볼 수 있겠죠.”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