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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랑하랴 ‘초설(初雪)’소설가 김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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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7.29  09:2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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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의 ‘나비부인’ 중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를 기억하고 있다. 

여인의 운명을 노래하는 그 낮은 목소리들. 한때 그 ‘허밍 코러스’는 얼마나 내 삶의 창 가까이에 있었던가.

길고 긴 기다림의 우수에 가득 찬 그 노래를 듣고 있자면 나는 세월의 주름살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여인을 보는 듯 했었다. 눈이 내리려는 날, 낮에 낮게 가라앉는 하늘처럼 그 노래를 들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노래를 듣고 싶다.

그 시인의 집에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금빛의 날개 같은 은행잎들이 다 떨어지고 나면 첫눈이 내릴 때였다. 이제는 남은 세월보다는 지나온 세월이 더 많은 그 시인의 집엘 다녀 나올 때면 그가 가졌던 젊은 날의 사랑을 생각하곤 했다.결혼을 한 후였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그 시인에게는 이혼을 할 만한 잔혹성이 없었다. 그 여인과 헤어졌다. 언제가 되든,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 한 번만 만나기로 하고,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해 겨울, 은행나무가 있는 그 노(老)시인의 집에 전화가 왔다. 
젊은 날에 했던 그 약속, 언젠가 한 번은 만나보리라던 그 약속을 부르는, ‘만나 뵙고 싶습니다’하는 전화였다. 표표히 시인은 여인의 집으로 찾아갔고, 비바람 아우성치는 세월을 건너온 자리. 고통도 슬픔도 사라진 얼굴로 그녀를 만났다. 한잔의 차를 대접받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리고 돌아섰다.

여인의 집을 나서니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긴 세월을 견디어 온 사랑에의 축복처럼.
눈이 내릴 때면, 저음(低音)의 생을 살고 싶다. ‘허밍 코러스’의 그 낮은 기다림처럼, 은행나무가 있는 시인의 사랑처럼 살고 싶어진다.내일, 아니면 모레 눈이 내리리라. 소리 없는 여인의 웃음인 듯이, 옛 친구가 내미는 따스한 손인 듯이, 야간 완행열차의 차표인 듯이, 눈은 내리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이었다. 
무릎까지 눈이 쌓이는 겨울을 정암사 계곡에서 보냈다. 제천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 작은 간이역에서 내려 석탄을 실어 나르는 트럭을 타고 또 두 시간여를 가야 하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초등학교로 난 길은 눈 속에 FM방송 같은 게 있을 리 없던 시절이었다. 국내 방송이 전부 끝나면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려서 외국 방송에 맞추어 놓곤 했다. 

중국이나 일본 방송은 불론 북한방송도 그때는 철야로 틀고 있었다. 곡명도 알 수 없는 음악을 얼마나 들었던가.

창밖에서는 밤새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밤마다 초를 켜고 있었다. 깊은 밤, 솨아하고 뒤뜰에 쌓인 하냔 눈을 쓸며 바람이 불려가면 촛불이 몇 번 흔들리고 했었다. 밖의 바람이 그토록 참혹하게 했던가. 내 삶에 있어 첫 번째 습지였던 그 시절을 이제와서 한두 개의 언어로 표현할 힘은 아직 나에게 없다. 

그것은 아마 열아홉이라는 그 나이 때문이었는지 도 모른다. 
어쩌면 ‘오! 태양, 바닷가 그리고 무역풍에 흔들리는 섬들,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픈 청춘’이라는 까뮈의 말처럼, ‘생각만해도 가슴 아픈 청춘’을 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찾아오는 사람은 우체부밖에 없었다. 떠나올 때 적어 준 주소로 친구들은 편지를 보냈다. 대학시험을 보러 간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졸업식을 언제 한다더라는 소식을 보내오는 친구도 있었다. 그 겨울에 쉬임 없이 내리던 눈발은 내 청춘을, 내 삶의 새벽을 얼마나 쓰라리게 했던가. 눈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비나 바람과 달리 눈은 어쩐지 영혼이 있는 것 같고 언어가 있는 것 같다. 
만나는 자리에 있어도 좋고 어쩐지 영혼이 있는 것 같고 언어가 있는 것 같다. 만나는 자리에 있어도 좋고 이별하는 자리에 있어도 좋은 눈. 가장 통속적인 것 같으면서도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청정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눈. 

눈을 보고 ‘흰 팔들의 여인이 온다’고 노래한 시인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던가. 
가을은 벌써 지났다. 목덜미를 싸늘하게 하는 몇 차례의 이른 추위가 지나가고 나면 이제 첫눈이 내리리라. 

땅콩 장수가 길거리에 나타나고 군밤이 제맛을 내기 시작하는 어느 날, 갑자기 내려간 기온으로 해서 여자애가 사내애의 주머니에 자꾸만 그 작은 손을 집어넣으며 ‘추워, 추워’하는 어느 저녁에 첫눈은 내리리라.지금 이 자리를 사랑하기로 하자.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기다리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온다. 오늘 이 자리를 사랑하기로 하자.
폭설이 내리던 겨울, 정암사 기슭에서 겨울을 보내던 내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포기한 것들만이 쌓여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랑, 아무런 꿈도 없는 미래,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그 시절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기다리지 않아도 눈은 내리고, 기다리지 않아도 겨울은 온다. 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은 바로 거기에 있다. 벽이 있기에 창이 있는 것. 

지금 이 자리를 사랑할 때 첫눈은 축복처럼 우리들의 어깨 위애 이마 위에 붉은 입술처럼 내려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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