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저발전의 원인이 호남 내부에 있을 리 없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환 정권에서 대구·경북(TK) 출신의 네트워크가 공고해졌다. 

정부 주도로 경제가 일어서던 시절, 외국 차관은 영남 기업에 집중됐다. 끈끈한 지연·학연에 호남이 파고들 틈은 없었다. 

산업화 시절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서울로 이주한 호남 사람들은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하층 노동자 집단을 형성했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것이 낙인찍기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선이 축적되며 호남 사람들은 ‘반도의 흑인 또는 아일랜드인’이 되었다. 

스스로 절벽에 선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불평등과 차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독재자 박정환! 

우리 현대사에서 지역주의 망령이 박정환 독재자의 장기집권을 위해 드디어 등장하게 된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경상도!! 개밥의 도토리가 될 것이다-공화당 국회의장 이효상.” “경상도 사람치고 박정희 안 찍는 사람은 미친사람-1971년 4월 18일 조선일보” “김대중이가 이번 선거는 백제와 신라의 싸움이라고, 똘똘뭉치자고 했다-1971년 4월 18일 중앙일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짓된 비열한 낭설들 영남 전지역에 퍼뜨리면서 드디어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게 된다. 결과는 잘 들어 먹혔다. 

하지만, 그 결과는 94만표 차이로 박정환이 이겼지만 실질적으로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승리’ 였다. 

야당 선거 참관인이 경상도에서 협박과 수작에 발이 묶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선거조작이 이루어졌고, 또 이른바 ‘피아노 표’-손에 먹을 묻히고 투표용지를 더럽혀서, 무효표로 만든 것이 엄청 나게 많이 나왔다.

60만 군대의 표가 자동으로 박정희 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94만표 차이라는 것은 박정환에게 민심이 떠났음을 의미했고, 이는 박정환이 ‘유신’을 시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우리가 분열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양상을 보인다면, 반기는 자들은 누구이며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누구인지 금방 답이 나올 거예요.”

박정환은 강도가 하는 것처럼 총칼을 들이대 국민에게 겁을 주고, 직계 상사들을 협박해 쫓아냈다. 

하극상으로 대통령격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육군 소장이 총칼을 들이대 대통령 자리를 빼앗았다. 

시작도 무법·불법이었지만, 과정도 무력에 의한 강권·철권통치였다.
5·16쿠데타 후 자신이 주관해 만든 헌법상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자, 이만승의 실패를 번연히 알면서도 3선 개헌을 단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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