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현 애국지사(愛國志士)’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독립은 먹고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는 말을 남긴 남자현을 흔히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 ‘여성독립 운동가’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에서도 남자현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특히 일본의 관동군 사령관을 죽이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드러나 일제에 체포돼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순국한 애국지사라고 싣기도 하였다. 

그리고 2015년 07월 22일 개봉된 영화 ‘암살’에서는 1,270만 명의 입장객을 모으며 흥행하였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 전지현은 남자현 애국지사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이 그랬고, 영화 ‘봉오동 전투’의 임자현도 그녀를 모델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남자현 지사는 1872년 경북 안동에서 유학자 남정현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에 한글을 읽을 줄 알고, 8세에 한문을 터득했다고도 한다. 

19세가 되던 해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결혼했지만, 1895년(고종32)에 미우라 고로 일본공사가 주동되어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을 맞게 된다. 

이때 의병을 일으킨 남편 김영주는 전투 중에 심한 부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그녀는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고, 을사조약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던 친정아버지를 도와 장정(壯丁)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이후 전업 주부로 살다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인 서로군정서에 입대하는데, 그녀의 나이 만 47세였다고 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여러 개 만들어 져 있었지만, 힘을 하나로 모으자는 뜻으로 그해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던 것이다.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비밀 연락망을 조직해 국내의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또한 독립자금을 모으고, 다른 나라와 외교활동도 하며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고 한다. 

이 당시에 그녀는 임시정부와 연계하며, 만주에서 부상당한 투사들을 간호하는데 전념하기도 하였다. 

1926년에는 조선 3대 총독인 사이토를 암살하기 위해 박청산, 이청수, 김문거 등과 함께 서울에 잠입하게 된다. 그는 거사의 시기를 엿보던 중, 마침 순종임금의 장례식(4. 26)에 사이토 총독이 조문을 위해 창덕궁에 올 것을 예상하고 암살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거사 당일 송학선이라는 청년이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3명에게 칼을 먼저 휘두르는 바람에 경계가 더 심해졌고, 결국 암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또한, 1931년 일본은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자작극을 버리고,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에 대한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 경이 하얼빈에 오자 무명지를 끊어 흰 수건에 ‘조선 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쓴 뒤, 이를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었다. 

1933년 당시 61세였던 남자현 지사는 하얼빈에 잠입하게 된다. 

그해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인 3월1일에 이규동과 함께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살해할 목적으로 무기와 폭탄을 휴대하고 가다가 안타깝게도 밀정(密偵)의 밀고(密告)로 인해 2월 28일 체포되고 만다. 

옥중에서 7개월간의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던지 그녀의 머리는 다 빠지다시피 하였고, 손과 발톱은 다 빠져 있었으며 온몸에는 피멍자국이었고, 죽창으로 찔린 상처에는 피고름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까지 모진 고문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강인한 어머니의 기개(氣槪)를 보이다가, 결국 병보석으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들과 손자의 병간호를 받게 된다. 

며칠 후 임종을 맞으며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면 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전달하라.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하얼빈의 여관에서 10월 12일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다행히도 그녀가 남긴 248원은 1946년 3.1절 기념식 때 김구, 이승만 선생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남자현 지사의 유해(遺骸)는 하얼빈에 있는 남강 외국인 묘지에 매장됐다가, 1967년 7월 26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安葬)됐다. 

이후 1962년에 이봉창, 신채호 등과 함께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됐다. 

이렇듯, 애국지사로만 알고 있던 남자현 지사가 크리스천의 선구자(先驅者)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9년 12월 30일 국민일보 전정희 종교국장이 쓴 ‘예수로 산 한국의 인물들’ 편에 의해서라고 한다. 

유교적 틀 안에서 자란 그녀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포산동에 이운형이 세운 ‘포산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다고 한다. 

어릴 적의 그 밀알이 자라서, 동 만주에 교회 및 기도처를 12군데나 개척할 정도로 신실(信實)한 믿음을 가졌던 그녀라고, 신학자들은 평가를 하고 있다. 

그녀의 아들 김성주에 따르면 어머니는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또한, 만주라는 공간에서 여성이 무장활동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으나, 그가 자신의 길을 꿋꿋이 열어 갈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교회들은 그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이다. 

즉, 한국교회는 갇히고 매맞아가며 동포의 정신을 일깨우고, 수많은 교회를 세워 해방을 염원했던 남자현 같은 신앙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지난 10월은 남자현 애국지사가 돌아가신지 88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구라도 한번 쯤은 되새겨 봐도 괜찮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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