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타비(我是他非)’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신축년(辛丑年)이다. 대학 교수들의 신문은, 올해의 한국사회를 의미하는 사자성어로‘아시타비(我是他非)’를 뽑았다고 한다. 

나(我아)는 옳고(是시), 남(他타)은 그르다(非,비)는 말이다. 

내가하면 로맨스이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내로남불’을 한자로 번역해 만든 신조어(新造語)라고 한다. 

그렇다,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태도를 이르는 말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깔린 가장 기본적인 사고체계(思考逮繫)가 내로남불 이라고 한다. 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자(者)들을 풍자(諷刺)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자기와 관련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단다. 
그러니, 이해하고 넘어가 달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봉황이라는 자(者)들은 무시무시한 권력으로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또한, 공익보다 사익, 정의보다는 내편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공동체의 나중이 어찌되든 알바가 아니라는 뻔뻔함이 아니겠는가! 

결국, 자기들의 잇속만 챙기면 된다는 괴리(乖離)에 이 나라의 참새들은 분노하고 있는 듯하다.
내로남불 이라는 특징 중의 하나가 자신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특히 상대편 진영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격하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한다. 바르고, 공정한 사회를 핑계로, 아니 개혁을 빌미로, 탄핵을 해야 한다며 벌떼처럼 덤벼들기도 한다. 

더구나, 판사의 판결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고 괘변(卦變)을 늘어놓기도 한다. 용서란 있을 수 없고, 인정은 말할 것도 없단다. 

그것은 로맨스가 아니고 불륜이어서 그렇단다. 
즉, 그들만의 선택적 판단으로 말이다. 죄의 유무는 정해진 법과 원칙에 의하지 않고 누구의 편이냐에 따라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다시피,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이 꽃이라고 한다. 

이 위에 더한 권력기관을 만들어 놓고 내편은 살려 두고 상대편만 죽이려 한다면, 이 어찌 자유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단 말인가! 

거대 여당이라고 해서 일방폭주를 하라는 것은 아닐 듯하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법위에 군림(君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국민여론을 무시한 억지는,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것이다. 징계는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법을 교묘히 짜 맞추기 한다면, 세상 천지에 그보다 더한 교만(驕慢)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이 나라에는 그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다 한다. 그래서일까!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그의 저서(著書)에서 이르기를,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징계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정죄와 징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분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한분 밖에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사람이 하려는 것이 교만이라고 한다. 

그렇다, 죄 중에 가장 큰 범죄는 자기가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는 교만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다. 

돌로 그 여인을 치려고 기세가 등등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에 양심의 가책을 받은 그들은,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조용히 그 자리를 뜨고 있었다. 

만약에, 동일한 상황이 지금 이 시대에 일어났다면, 이 시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 서로 낄낄대며 돌을 던지고, 동영상을 찍고, SNS에 올리고, 열심히 퍼 날랐을 것이다. 요즘, 이 땅에는 총체적으로 위기라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이럴 때 일수록‘내로남불’이 아닌 ‘남로내불’이 되라고 강조한다. 
즉, 남이 하는 일은 로맨스로 귀엽게 봐주고, 내가 하는 일은 불륜처럼 화들짝 놀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숙한 공동체 구성원의 특징이란다. 남에게는 베풀고, 자신에게는 엄격한 율법을 적용하는 삶이라고 한다. 

최소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감싸주고, 덮어주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엄격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이 정죄와 징계와 보복을 외친다 할지라도 교회와 교인들은 포용과 용서로 정죄를 풀어 주는 곳이 돼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징계와 보복이 아니라 오른편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대주고,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주어야 하는 판국인데, 어찌하여 믿음과 양심도 없이 부귀영화만 누리려고 하느냐는 질타 같아서 부끄럽기만 하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새로 등장한 유행어가 있다. 
비대면을 일컫는 언택트(Untact)에, 온라인을 통한 외부와의 연결(On)을 더한 방식이다. 즉, 온라인(OnLine)으로 삶을 즐기고, 비대면으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말하고 있다. 

이런 불편한 현실에, 한자인 따뜻할 온(溫)을 합성한 신조어가 바로 ‘온택트(溫Tact)’라고 한다. 

금번의 송구영신 예배는 보건당국의 지침에 의하여, 부득이 조치원 성결교회(담임 최명덕 목사)에서도, 영상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큰 감동의 시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예배자들 앞에서는 산(山)도 물(水)도 거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는 먼저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야 된다고 몇 번을 강조하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국일수록, 예배에 온택트(溫Tact)하고, 기도에 온택트(溫Tact)하며, 복음에 온택트(溫Tact)하라는 메시지(message)는, 이 지역 세종시를 뜨겁게 달구고도 남은 듯하다. 

그러고 보니 점입가은(漸入佳恩)의 신조어가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 금년의 사자성어 아시타비(我是他非)가 아닌, 온택트(溫Tact)에 사활(死活)을 걸어야 할 이유 가 있다면, 그 길이 곧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번 곱씹어 볼만 하지 않은가!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들 새해를 맞이하여, 가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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