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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서서평 선교사’
세종매일  |  yg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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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2.29  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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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구한말,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난 이듬해인 1885년에 선교사들이 이 땅을 밟은 후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인들과 오랫동안 삶을 같이했던 선교사들은 약 1,500명이라고 한다.

이들 중에 푸른 눈의 조선인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선교사, 백의의 천사로 불리는 이가 바로 서서평 선교사이다. 

그의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으로 1880년 9월 26일 독일에서 미혼모 안나 셰핑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세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안나는 딸을 버리고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에게서 버림을 받은 그녀는 외할머니 품에서 자랐으며, 9세 때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주소쪽지 하나들고 건너갔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어머니로부터 외면을 당하자,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카톨릭 미션스쿨에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반이 되자 뉴욕시립병원에서 실습을 받았다. 

그때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감명받은 그녀는 전통적인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뉴욕에서 성경교사 훈련을 받던 중, 동료 교사로부터 조선에는 의료시설이 매우 부족하고, 위생관념 조차 없어서 수 많은 환자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들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召命)이라 여기고, 1912년 3월 10일 생면부지의 땅, 조선에 도착하였다. 

입국 초기에 그녀는 선교회 지시에 따라,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 거족적(擧族的)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그녀는 일제의 만행으로 부상당한 조선인을 밤낮없이 치료해주었고, 투옥된 독립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일제로부터 서울 활동이 금지되어 광주에 내려가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제중원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그녀는 전주와 군산. 광주 등지를 오가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여성들에게 성경과 실과(實科)등을 가르쳤다. 

일제 강점기 때의 여성들은 대부분 질병에 시달리거나 굶주리고 있었으며 소박맞아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서서평은 그녀들을 구제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교육과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1년 중 100여 일 동안 말을 타고, 전라북도는 물론 제주도까지 건너가 여성들을 돌보곤 했었다. 

그리고 1922년에는 미국의 친구 로이스 닐의 후원을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신학교인 이일학교((현)한일 장신대)를 설립하였다. 

또한, 그녀는 부인조력회, 조선여성절제회, 여전도연합회 등을 창설하여 여성의 권리보호에 진력함으로써 조선의 여성운동,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동양인을 미개인 취급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만큼은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한다. 

평소에 서서평은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색 통치마를 입었고 남성용 검정 고무신을 신었으며, 음식도 된장국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무렵, 미국의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들은 한 달 생활비로 300전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10전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빈민(貧民)과 병자, 여성들의 자립을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1929년 그녀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어머니 안나를 만났다. 
그런데 매정한 어머니는, 고된 선교사 생활로 인해 거지꼴이 된 딸의 모습을 보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또 외면했다. 

이렇게 어머니로부터 세 차례나 버림을 받은, 아픔을 신앙과 인간애로 승화시켜 조선의 자식들에게 더 큰사랑을 전해주었다. 

그녀는 또 수양딸 13명과 나환자의 아들 1명 등 한국 어린이 14명을 입양하여 훌륭하게 키워냈고, 시대가 외면했던 과부 38명과 동거하며, 새 삶을 살도록 해주었다. 

특히, 1933년에 그녀는 나환자 53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행진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일제 총독부의 나환자 정관수술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총독부로부터 정관수술 정책을 폐기하고 소록도에 갱생원을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나환자들을 치료할 때에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즉, 피고름을 빨아 주는 일도 서슴지 않았기에,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조선의 작은 예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1934년 6월 26일 광주에서 만성 풍토병과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해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는 광주 최초로 시민 사회장으로 치러져, 선교사 묘원(墓園)인 광주시 양림동 108번지에 고이 잠들어 있다. 

이렇듯, 조선 땅에서 22년간의 헌신적인 삶을 접은 그녀의 유산은 담요 반장, 동전 7전, 강냉이 가루 2홉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녀는 임종(臨終)에 앞서 자신의 시신을 의학용으로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침대 맡에 걸려있는‘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라는 좌우명으로 살다간 눈을 감은지, 약 80년이 지나 다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어느 기독교 방송사에서 1년여 동안 제작한‘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라는 다큐멘터리의 영화가 2017년 4월 26일 개봉되면서 절찬리(絶讚裡)에 상영되고서 부터라고 한다.

그렇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했던가! 

예수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는 듯하다. 

요즘, 이 나라에 ‘섬김’은 간데없고, 봉황(鳳凰)들의 목소리만 요란하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다. 

즉, 정권연장, 보복인사, 지지율 관리, 거짓말 논란, 부동산문제, 세금폭탄, 권력수사 방해(원전, 울산선거, 라임사태). 공수처 설치에 목을 매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야 있겠는가! 다만, 우리 참새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잘사는 나라, 행복한 국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금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다가오는 성탄(聖誕)의 기쁨이 여러분들의 가정에 가득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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