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봉건시대의 잔재와 강력한 독재의 시기에 갇혀있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무수한 이들이 애급 땅에서의 유대인들처럼 위대한 권력자와 재벌들을 위한 건설의 역군이 되어 성전을 쌓았고, 채찍보다 더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동족을 못살게 굴던 친일파들이 해방된 후에도 여전히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이 우리 경찰을 장악했고, 일제하에서 검찰과 판사를 하던 사람들이 사법부를 장악했다.

천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을 다해라. 그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라고 떠들어대던 자들이 우리의 문화계·교육계·예술계를 장악했다. 참으로 통탄스럽고 부끄러운 우리의 역사다.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만들었고 석굴암은 김대성이 만들었으며, 경복궁은 대원군이 건축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이것은 잘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허구다.
진실한 건설자는 그들이 아니라 이름도 없는 석수, 목수, 화공 등 백성의 무리들이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정확히 깨달을 때 이름 없는 백성들에 대한 외경심과 역사의 참된 주인에 대한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후 아버지는 인권과 민주화운동과 평생 진보당 활동에 나섰다.
대법원은 재심청구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무죄판결이 나왔다. 2011년 1월 말에 대법원에서는 재심판결에서 ‘제1공화국의 조작’임을 시인하고 조봉암의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조봉암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다. 그리고 유족들은 민·형사상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12월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 이후로 남한에서 진보 계열의 정치집단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만승 독재자에 이어 제2대의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 온 나라를 공포로 물들인 박정환이 있었다. 그러나 메시아에 대한 믿음과 같은 더 나은 사회로의 열망이 결국, 민주화의 선지자들과 함께 고난의 땅을 탈출하게 했고, 희망을 향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1964년 8월 14일, 박정환 독재정권의 저승사자라 불리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민혁명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붙여 57명의 청년들을 잡아들인다. 이중  41명은 구속하고 16명을 지병수배하게 된다.

그해 6월에 있었던 굴욕적인 한일회담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독재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4명의 검사 중 3명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한 시대와 한 국민의 감성과 취향, 바람과 고뇌, 정념과 욕망, 미의식과 사상의 표현인 거대한 두루마리와도 같은 저항은 그 시대나 지역을 넘어서는 인류의 영원불변한 유산이다.

현실의 표상이자 미래를 고지(告知)한다. 저항은 공공선(公共善)의 증진과 반듯한 역사, 올바른 사회를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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