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아버지의 시대에는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6·10민주항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전쟁과 상처, 가난과 독재의 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에는 박정 환 정권의 졸속한 한·일회담이 이루어졌다.
유신말기 박정환은 정신문화연구원 을 만들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독재 3대 세습 이만승, 박정환, 전두환은 자유언론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자유언론과 권위주의 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펼치는 사회교육운동은 자신의 교육·철학적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에게 사회교육운동은 인간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사회개혁운동이었다.
인간화 교육, 중간집단 교육은 1970년대 엄 혹의 유신시대에, 그 유신시대를 대응해내는 사회운동가 아버지의 경이로운 기획이었다. 한국의 노동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지도자들의 산실이었다.

스스로 참여하는 교육을 통해 삶의 이치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유신권력은 이 교육운동 을 ‘공산주의’의 올가미를 씌워 탄압했다.

권위정권은 국민들 뒤를 사찰하고, 언론을 장악 통제하며 정부가 범법행위와 악랄한 공안 정치로 일관하며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진보와 보수, 지역감정 으로 편 가르기 일색이었다.

야만의 시대가 질주하고 있었다. 1979년 3월 박정환 유신독재는 사회교육운동을 ‘반공법’으로 탄압하고 나섰다. 민주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던 지식인들과 사회교육을 받는 노동자·농민·여성 등을 연행해 갔다. 그들은 그 무시무시한 정보부 지하 2층에서 온갖 정신적·언어적 고문을 당했다. 

정보부는 그들을 불법·비밀 용공단체를 만들어 ‘북괴 노선’에 적극 동조했다”고 발표했다. 고문과 조작으로 만들어낸 사건이었다.

악마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 박정환 향수라는 것은 결국 자기 가치파괴로 귀결 될 게 뻔하다. 더이상 우파 보수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  박정환 시대 이후 민주공화국 시절에 출생한 청년층에게는, 박그녀는 박정환 시절의 기억은 없지만, 죽고 나서도 두고두고, 대한민국에 해를 끼친 재앙의 씨앗과 우환거리를 남긴 셈이다.

박그녀의 최대실정인 박그녀·최순실게이트 역시, 박정환의 집권 시기에도, 최태민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정치적 문제가 되었는데, 박정환은 이를 해  결하지 못하고 방치하여 나중에 파국의 씨앗을 뿌렸다.

박정환 독재에 맞서며 ‘국가의 역할과 개혁의 덫’이란 주제로 저항과 이성의 아버지는 자신의 삶, 그 자세를 천명했다.

진보지식인으로서 수난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증언이기고 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쳐 독재권력에 맞선 민주화운동, 분단 극복을 향한 통일운동을 누구보다 온몸과 마음으로 펼친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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