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강남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자동네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가장 높은 지역이고 가장 출세지향적이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에서 출세를 하려면 이른바 sky를 나와야 한다.

sky를 가려면 강남 대치동의 유명한 학원과 고액과외를 받아야만 한다. 이는 인구에 회자된 일반화한 정설이며, 서울대 합격자들의 출신지역 분포 조사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지방고 출신의 우수한 두뇌들이 서울의 부유층 자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일류대학에 입학하려면 강남의 일류고등학교로 유학을 와야만 하는 현실이다.

강남은 기득권과 부의 상징이다. 이런 이미지가 형성되고 굳어진 것은 개발독재가 낳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70년대 박정환 정권은 수도권 집중화 정책을 펼침에 따라 인구가 집중하였고,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축으로 급속한 고도성장을 하였다. 하여 발전 속도에 걸맞은 신도시가 필요 불가결하였다.

강북 중심의 서울은 너무 비좁을 수밖에 없었다.
허허벌판 논밭, 영동이라 불리던 강남은 어느덧 개발독재시대, 성장과 부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갈수록 늘어나는 서울의 인구집중을 해소하기 위한 정책수립이 강남개발이었고, 좁은 땅에 최대한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선 대단위 아파트 건설은 필요 불가결하였다.

70년대 아파트가 주거형태로 본격화하였고, 강남은 온통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로 공룡화하고 있었다. 강남의 특정 이념이 보수 성향을 띠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즈음 박정희 정권의 경상도 우선 개발정책으로 호남은 산업기반이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호남의 수도권, 특히 서울로의 이주 러쉬는 필연적 산물이었다.

호남인의 서울이주는 60년대 후반을 거쳐 유신말기인 70년 후반에 절정을 이루었다. 가난과 차별을 벗어나고자 했던 호남인의 한은 자식교육열풍을 몰고 왔다.

그 시대 호남인 2세의 계층 간 신분상승의 기회는 오로지, 서울로 유학하여 일류대학을 졸업하여 판·검사가 되거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나 공기업, 은행에 취직하는 것이 유일한 출세의 풍토이자 발판이었다.
 
부모들의 교육열과 호남인 2세들의 학구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다. 70년대 호남인의 서울로의 상경러쉬로 강북지역, 산비탈 달동네에 판자촌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대표적인 동네가 종로구의 창신동, 관악구의 봉천동, 신림동, 구로구의 구로동, 금천구의 독산동, 시흥동, 강서구 화곡동, 양천구의 신월동, 성북구의 삼선동, 미아동, 길음동, 강북구의 월곡동, 서대문구의 북아현동, 남가좌 모래내, 중구의 약수동, 신당동, 성동구의 옥수동, 금호동 등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대부분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들이다. 그들의 주거환경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수세식은 꿈도 꿀 수 없고 화장실이 따로 없어 대부분 공중화장실을 공동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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