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義士)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현재 국가보훈처에서 훈장과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1만4,329명인데 이 가운데 여성은 전체의 1.9%인 272명에 불과하다.

그것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은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아 왔고,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고, 군수품을 운반하는 등 독립 운동을 지원하는 일을 주로하다 보니 기록들이 많지 않을 뿐이지, 우리 선조들의 독립 운동에 남녀 구분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272명 중에는 유관순 열사(烈士)와 영화(‘암살’)의 실제 인물로 3.1운동 이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을 이끌며, 관동군사령관이자 일본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사살하려다가 붙잡혀 순국한 남자현 의사(義士) 그리고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여성으로는 처음 사형 선고를 받았던 안경신 의사(義士)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있다.

이들중 특히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을 위해 총을 들었던 박차정 의사(義士)를 빼놓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는 1910년 5월 9일 경남 동래군 복천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용환과 모친 김맹련의 3남 2녀 중 넷째였다. 그녀가 1918년 설립된 동래성결교회((현) 온천중앙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은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문은 선산 군수시절 기독교를 받아드린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일찍 신문화(新文化)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데 탁지부 주사로 측량 기사였던 부친 박용환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항일 운동을 하던 중, 유서 1통을 남기고 다대포 앞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하면서 단란했던 가정에 어려움이 찾아들었다.

그의 모친 김맹련은 남편과 사별 후, 자녀들을 이끌고 동래성결교회에 출석하며 생활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부산 동래는 지형학적으로 일본과 거의 맞닿아 있어 반일감정이 역사적으로 깊은 곳이다.

특히 한일 수호조약(1876)으로 부산포 개항 이후, 일본의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 되었고,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면서, 동래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차정의 친가와 외가에는 여러 항일 투사들이 배출돼 항일 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의 항일 운동은 대체로 기독교 사회주의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예를 들어 김두봉은 모친 김맹련의 사촌이었는데, 조선 의용군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또한 김두전은 김두봉의 사촌이자 김맹련의 육촌지간으로 ‘흑도회’와 ‘북풍회’를 조직해 항일 운동에 앞장섰으며, 해방 후에는 제헌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다 6.25 전쟁 와중에 피랍된 후, 김두봉과 함께 김일성 반대 운동을 벌이다 숙청(肅淸)된 인물이었다.

이렇게 박차정은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독립 운동을 하는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우면서 성장하였던 것이다.

특히 그녀의 큰 오빠 박문희 전도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박문희 전도사는 경성성서학원((현)서울신학대학교)을 졸업한 후, 안성교회. 경남통영교회. 서울독립문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25년 교역자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래청년연맹을 창립하고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으며 중국으로 망명 후에는 약산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서 활동하다가 몇 번씩이나 체포와 구금을 반복한 항일 투사(鬪士)였다.

그녀의 나이 14살이 되던 1924년에는 조선 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이듬해 3월 동래 일신여학교에 입학하면서 항일 독립운동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순종황제의 장례식날짜에 맞춰 전국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행하였다. 이날이 바로,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때 일신여학교의 동맹휴학과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박차정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또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지역 학생들과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만세시위 행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29년 11월 3일에 일어나 이듬해 3월까지 전국 320여 학교에서 5만 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이렇게 시위운동 때마다 주동자(主動者)로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拷問)으로 인하여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때 중국에서 의열단 활동을 하던 오빠의 권유로 망명한 후, 김원봉의 ‘의열단’에 합류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두 사람은 남경으로 이동하여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고, 박차정 은‘조선혁명 정치군사 간부학교’의 여자부 교관으로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이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을 거두고, 결의를 굳게 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에서 뛴다.”

이것은 그녀가 손수 작곡한 이 학교의 교가(校歌)이기도 하다. 그리고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 조직은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등 다섯 개의 독립 운동단체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었는데, 이때 박차정은 부녀부 총 책임을 맡아 여성당원의 조직을 확보하는데 힘썼으며, 이후 1937년 7월에는 이성실과 함께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조선 여성들이 역량을 모아 민족독립과 여성 해방을 쟁취해 나가자고 촉구했다. 

이듬해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항일 군사작전에 돌입했을 때에도 그녀는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늘 선봉에서 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39년 2월 중국의 곤륜산(崑崙山) 전투에서 심한 총상을 입고 말았다. 병상에서도 남편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1944년 5월 27일 결국 그 부상의 후유증을 털어내지 못하고 생(生)을 마감하였다.

아! 그녀의 나이 34세였다! 병상에 누워있을 때 한 동료가 “왜 사대부 여인답게 꽃으로 살지 않느냐?”라고 묻는 말에

“나도 꽃으로 살고 싶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라는 감동적인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전투복 차림으로 총을 들었던 그 여인이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상하였고, 2001년 (사)박차정 의사(義士)숭모회는 부산시 금정구 구서1동 481번지에 동상(銅像)을 세워 그녀의 큰 뜻을 기리고 있다.

그렇다! 그들은 말을 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죽을 때 살아 있을 수 없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愛國志士)와 순교자(殉敎者)들이었다. 그런데, 요즘 봉황이라는 자(者)들은 정부는 없고 정권만 보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기만 하다.

아! 우리 참새들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다운 나라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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