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며 저항이다”

              ▲김재찬 소설가.
              ▲김재찬 소설가.

우리가 남의 글을 읽고, 그것이 문학이든, 문학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지 간에 절실한 감동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작자의 생생한 목소리와 몸짓과 부딪혔을 때이다.

누구나가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누구나가 다 무가치하게 보아버리기 쉬운, 잡문(雜文) 같은 데에서도 때로는 충격적인 감동을 받게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 天風(천풍)을 연재한지 7년여가 되었다.

연재 초기에만 해도 나의 중요 한 즐거움은 나의 사회적인 활동 속에 있었다.

나의 욕망도 야심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사이 허탈감 같은 것이 있어 문득, 되돌아보니 부족한대로 열심히 써 왔고, 갈 길이 멀지만 어느덧 연재 횟수 500회를 맞아가고 있다. 

天風(천풍)은 7부로 나눠 계속 집필해 나갈 계획이다.

1부는 나의 시점에서의  마음속엔 할 말이 많은데, 말로서는 도저히 나타내지 못한 시대적 상황의 아픔을 겪은 세대들의 이야기들이었고, 2부는 나의 인생관과 철학이 기초가 되어 종교와 문학을 함께 생각해 본 것들이었다.

소설에 나타난 사상·의식에 더불어 스스로의 체질이 그래서일까. 문우들이 나를 곧잘 좌파 문인으로 부른다. 자신도 모르게 권위주의가, 또는 여론적인 것에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요즘 작가들의 민주적 의식이요, 작가적 정신이 돼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당시의 여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의 결과였다.
내게 소설은 끈임 없는 저항이요,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자신을 상실한 추종이 민주주의를, 아니 인생을, 그리고 역사를 올바로 표현할 수 없다.

그러한 비판이 아무리 문학적 형식을 갖추었다고 해도 진실한 감동을 줄 수는 없다.

세상을 사는 보람은 그것이 아무리 헛된 결과를 가져온다 해도 우선은 기대를 걸어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 내 행동은 아무데도 없었다. 내 얼굴 이 들어있을 리 없었다.

내 영혼에서, 생명에서 우러나오는 내 육신의 소리가 아쉬운 때가 또 있었던가. 나의 사상, 나의 경험, 나 자신의 정직하고 성실한 목소리만 이라도 내보자는 것이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공자도, 그 시대의 시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도 석가모니도 다 같이 공자와 같은 정신생활의 혁명가였다. 그와 같은 혁명적인 요구는 내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나의 인간적 특성이나 사상의 본질은 초시대적(超時代的)인 것일 수도 있다. 소설은 가장 시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초시대적(超時代的)인 것이 없다면 그 소설은 생명을 잃고 만다.

이제 본격적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 독재정권의 핍박과 공포정치, 언론탄압, 정경유착, 지역감정, 지역격차, 독선, 허구와 위선, 군사문화, 각종 폐해와 만행, 인권말살, 숱한 간첩조작, 인혁당 사건, 5.18 광주민주항쟁, 부마항쟁, 촛불정신, 역사왜곡, 친일행적, 독립군 토벌, 더 나아가 보수 가치에 대한 냉혹한 평가를 내려야 한다.

암흑기의 그 시대에 절대 금기시됐던 그들의 일그러진 영웅상을 가감 없이 날선 비판을 통하여 통렬히 세상 에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기에 소설을 쓴다.

나는 항상 공상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잠잘 시간이 가까워 오면 나는 무서운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책을 읽게 되고 글을 쓰게 되는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이러한 잠들지 못하고 애쓰는 시간 속에 고독 해지려 한다.

 
나는 잠들기 지루하고, 어쩌면 너무나 고요한 안타까운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불안증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다. 그러한 시간에 쓰여 진 이야기들이 누구에게도 구원의 문장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더욱 안타깝고 슬프다.

天風(천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인류나 인간을 대표하기 전에, 어떤 사상의 대변가(代辯家)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신념을 자기의 육신으로서 말하 는 자기 자신의 표현자(表現者)들이다.

내 소설에는 이러한 사정이 훤히 드러난다. 내 자신의 경험, 자신의 신념을 자신의 양심을 말하고자 한다. 어떤 사상이나, 시대나, 현실의 노예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내 육신의 발언만이 진실한 공명을 얻을 수 있다는, 이 솔직하고 단순한 이치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잘 것 없는 무명(無名)의, 한 글에서도 그것이 그 사람의 육신의 발언일 때, 우리는 쉽게 그것을 거부할 수가 없는 법이다. 문장가(文章家)가 아닌 사람들의 어느 글에서도 우리가 감동을 얻을 때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설을 연재하기 위해서 그동안의 글들을 정리해 보고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놀랐다.
이미 연재된 것 속에서도 버려야 할 것이 있었고, 지금까지 내가 넣지 않았던 것 중에서도 버려야 할 것이 많았다. 초기에 연재된 것 중에는 더욱 그런 것들이 많았다.

독자야 어떻게 생각하든 먼저 자기가 남기고 싶은 글을 써야 할 것이 아닌가. 내 마음에도 들지 않은 글들을 수없이 발표해 왔다면 나는 대단히 잘못 살아온 것이다.

소설 속에 넣고 싶지 않은 것이 꽤나 많았다. 이 얼마나 엄청난 낭비인가.

그러한 낭비의 세월을 앞으로는 갖지 말아야겠다. 그러한 허망한 정력의 소비가 또 있어서도 안 되겠다. 앞으로 나에게 남겨진 세월은 너무나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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