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우리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다.

나는 지금도 진보와 보수를 말하며 아버지가 던진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사회는 진보하는 데 왜 보수 는 반성치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는가?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 답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또 다시 기나긴 세월이 소요될 필요는 없다. 한국 보수가 가장 부족한 것은 도덕이다.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군부독재의 태동!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5·16군사쿠데타’를 틈만 나면 ‘혁명’으로 미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쿠데타와
반란, 그리고 혁명은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으면 좋겠어…”
 
6·25 직전 박정환은 숙군(肅軍) 연루자로 군부에서 언제 잘릴지도 모르는 상황 이었고 이화여대생이었던 내연녀 이현란과의 문제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결혼 생활도 파탄이 났다. 매일 술이나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기 일쑤였고, 월급은 술 집 외상값 갚기도 바빴다. 완전폐인 상태였다.

교사시절 문경의 하숙집엔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떡하니 붙여놓고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박정환은 공인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여순반란 사건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다. 그래서 그는 이만승의 장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전향하여 반란군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사형을 면제 받는다.    

박정환은 자유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이 뚜렷하다. 박정환이 민족적 민주주의 운운하는 데, 보통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할 때 민족적 민주혁명이라고 한다.

박정환 사상 논쟁은 이른바 ‘황태성사건’을 계기로 더욱 격화된다.

황태성 사건이란, 박정환의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이자, 일제시대부터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차관)이라는 고위직에 있다가, 5·16직후인 1961년 9월 박정환과의 비밀 회담을 위해 밀사로 내려온 것을 말한다.

그런데 박정환은 황태성을 체포 해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하면서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황태성의 인도를 요구하는 미군측의 강력한 요청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한다.

윤보선과의 투표일이 가까워오자 ‘이북에는 김일성이 있고 남한에는 박정환이 있다.’ ‘이북에는 공산당이 있고 남한에는 화공당이 있다.’라는 말이 퍼졌다.

화공당 창당 자금은 황태성이 댔고, 그로부터 화공당 창당에 대한 밀봉교육을 받았다.

야당의 색깔론 공세로 코너에 몰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박정환은 ‘나를 메카시즘이란 후라이팬에 달달 볶아 새빨간 빨갱이를 만들려는 수법이다’라며 반박했지만, 목소리에는 그리 힘이 없었다.

그렇다면 박정환이 좌익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인가?

그간 보수정권의 우상화정책으로 박정환을 여전히 반공투사이자, 애국자로 섬 섬기고 있는 광적인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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