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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제임스 게일 선교사’
세종매일  |  ygnew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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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15  09:4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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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지금으로부터 약130년 전 은둔의 땅에 복음을 들고 와 스스로 조선인이 되고자 했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

그는 해방 전까지 한국에 왔던 1,48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한국학 연구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게일은 선교사 이면서도 탁월한 언어학자였고, 저술가였으며 역사가이자 민속학자였고, 또 성경 번역가였으며, 목회자였다.

특히 한국의 역사·문화·민속·언어에 해박(該博)했던 한국학의 대가였다.
그리고 부산에 왔던 첫 서양 선교사로서 부산 지방의 기독교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게일은 1863년 2월19일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농부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농장에서 일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엘로라에서 중·고등학교를 거처 21세 때인 1884년 토론토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 2학년 때인 1885년 5월 영국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그곳의 선교 기관에서 약 6개월간 활동을 하였으며, 1888년 6월 12일 문학사 학위를 받고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한 게일은 당시 북미 대륙에서 일고 있던 해외 선교를 위한 학생 자원 운동의 영향을 받고, 토론토대학 YMCA 선교부를 통하여 그해 12월 12일 25세의 나이로 한국에 왔다.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게일은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 기거하면서 어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3개월이 지난 1889년 3월 17일에는 내지 답사를 겸한 순회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해 8월에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하여 초량에 살았다. 이때부터 1년 남짓 부산에서 체류하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호주의 첫 선교사인 데이비스의 죽음을 지켜보고 그를 손수 매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게일이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데이비스의 최후에 대한 흔적이 후세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1890년 말 경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 선교부가 해체되자, 그 다음 연도에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로 이적하였고, 이때부터 게일은 한국을 떠날 때까지 북 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원산 지방에 거주했을 때는 주로 한국인 조사(助事) 이창직의 협조를 얻어 성경 번역은 물론, 많은 서책들을 저술하고 번역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895년 출판된 ‘천로 역정’이었다.

이것이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영사전 편찬을 시작하여, 북 장로교와 미국 남 장로교 선교부의 공동 출자로 1897년 ‘한영 대사전’을 최초로 출판하였다.

그해 첫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간 제임스 게일은 5월 13일 인디아나 주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이듬해 다시 서울에 와서는 고종 황제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그 당시에 그는 독노회(獨老會)를 비롯한 여러 사역(使役)기관에 관여하며 신구약 성경을 출판하고 노방전도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00년 9월 9일 원산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여 지금의 연동교회인 연못 골 예배당에 초대 담임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게일은 선교활동과 더불어 학교를 세우고 근대화된 교육의 장을 열어나갔다.

조선 후기 격변의 시대 상황과 일제 침략에 의해 불안하기만 했던 젊은이들에게 자주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는데 힘썼으며, 왜놈들의 만행을 서구에 알리는데 주력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인이 부르는 찬양과 설교, 그리고 성경만큼은 조선인들만의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조선의 가락으로 찬양을 짓고, 조선인이 쓰던, ‘하나님’이란 호칭을 정착화시켰다.

그렇게 그가 펼쳐 나간 복음전파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복음을 보다 쉽게 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영적으로 척박하기만 했던 그 시대에 연동교회 담임으로 들은 바를 가르쳤던 그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잘 이어져 오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39년간 조선인으로 살다간, 조선의 선교 역사에 길이 남을 ‘순례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두려움을 이기고 내한하여 평생을 한국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게일은 1927년 6월 22일 한국을 떠났고, 1937년 1월31일 7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영역한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구운몽을 비롯한 조선의 대표작들이 지금도 캐나다 최대 규모인 토론토대학의 토마스 피셔 희귀본 도서관에 수십 권이 진열돼 있다고 한다.

“내가 내 몸 안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는 바울의 고백과 같이 목숨을 다해 이 땅에 예수의 흔적을 남기고 간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닐까!

요즘, 어느 성결교단의 연단에 붙어 있는 표어 중에 “들은 바를 가르쳐라”의 성구(聖句)는 분명 게일 선교사가 물려준 ‘예수의 흔적’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 오늘도 그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면 먼저 정직(正直)을 구하고 철저히 회개(悔改)하라고 가르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듯하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말하기를 어느 순간부터 이 나라 종교에는 회개라는 말이 없어져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 말은 하늘의 불화살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 하늘의 불화살을 무서워하지 않는 간 큰 자(者)들이 백주에 짖어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요즘 옳고 그름을 떠나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하는 말들이 아니겠는가! 모두 다 자중(自重)하라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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