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초인, 그 정반대의 존재가 말인(末人:der letzte Mensch)이라고 하여 대립시켰다.

이에 대하여 말인은 자기 초극의 의지(意志)도 힘도 창조적인 생명력도 잃어버려 평균화하고, 더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쾌락에만 빠지는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초인의 세상은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말하였다’중에서 말한 것을, 초인의 구체상(具體像)은 짜라투스트라이고, 그리스도교에서의 신(神)에 대신하는 인류의 지위자이며, 민중은 그의 복종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니체의 주인사상은 그 후 나치에 의해 곡해(曲解)된 적도 있다.

 아버지는 실존철학의 입장에서 새로운 조명(照明)을 했다.

초인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초극해 나아가야 할 목표였고, 영겁(永劫)으로 회귀(回歸)하는 운명을 참고, 신을 대신하는 모든 가치의 창조자로서 풍부하고 강력한 생(生)을 실현한 자였다.

평온함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행복감에 젖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몰입되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순간에 눈부시게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민낯으로 현실과 맞서는 당당함이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니체 덕분이다. 니체의 초인은 진한 붉은 색이다. 삶에 대한 열정, 진홍보다 붉고, 태양보다 뜨겁다. 내 안에서 숨 쉬는 초인을 발견하는 건 은근한 즐거움이다.

나는 전통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진취적으로 산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안의 초인을 향해 미소 짓는다. 내 안에는 초인의 아버지가 자리하고 있음도 본다. 온화하지만, 무력한 나, 이기적인 나, 훗날 나는 초인처럼 따뜻하고, 쿨한 남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욕심이 아니라 이 두타입이 조화를 이루는 게 성숙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를 읽던 그 밤은 이제 추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밤에 불었던 바람은 지금도 내 가슴에 일렁이고 있다. 내 안의 초인은 이렇게 속삭였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세찬 바람은 나를 열었다.

아버지, 이제 제가 세상에 모르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어요. 예전엔 사람들에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 보내는 선물’이라고 말했죠.

지금도 그 생각엔 여전해요. 아버지 힘드셔서 그렇게 술을 드셨었지요? 아주 가끔 힘들면, 저도 그렇게 하렵니다. 나로 하여금 늘 목가적인 꿈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다.

아버지는 내게 낚시질은 기다림을 수반하지만, 언젠가는 풍요와 재생의 상징인 대어를 낚을 수 있다는 희망도 남겨주고 떠났다.

인간은 완전히 혼자 살수도 없고, 늘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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