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바로 인내다.

아마도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할 수 없는 신비한 합일(合一)이다. 일그러진 얼굴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은, 인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이라고 묵묵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친다.

인간은 왜 이렇게 자학하는가? 인내가 인간 승리의 표상인가? 이 기분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가장 고난 받는 곳에서 가장 절실한 예언이 드러난다.

“가장 무서운 일은, 우리 영혼이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암담한 상태에서 사랑하기를 그치는 것이야.”
“…”
“하느님 없음이 결정적 사실이 되기 때문이야.”

참혹한 고난의 현장에서,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싸움터에서 다시 사랑하기를 시작할 때 하느님이 현존하기 시작한다고 믿는 게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실제, 니체가 말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닥에서 기는 자들이 높은 자들에게 저항하는 종교다.

“니체는 이것을 보고 어찌했죠?”
“‘천한 자들의 복음은 복음을 천하게 만든다’고 비난했어.”

이때 시몬베유는 아예 그리스도교 신앙이 출발부터 히브리노예들의 종교임을 당당히 밝혔다. ‘그래 맞아, 그래서 뭐?’하고 물었다.

“아버지 말씀과도 같이 사랑은 가고 러브만 남은 세월이에요.”

지옥에 빠진 모든 중생이 구원될 때까지 열반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지옥 같은 대한민국에서 우리 시대의 노예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감당하겠다는 의지다.

스파르타쿠스(기원전 73년부터 2년 뒤인 기원전 71년까지 노예들을 이끌고 반(反)로마 공화정 항쟁을 지도한 노예검투사)와 함께 봉기한 노예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응답은 십자가 처형이었다. 그럼에도 노예들을 친구라 부르며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은 예수에 대한 제국의 답변 역시 십자가였다.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뜨거운 노래를 심장에 묻은 사람들이 지금 거리에 있다. 이제 그들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을까.

초인이 내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완전성이나 제한을 극복한 이상적 인간(理想的 人間)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인간은 중간자(中間者)로서의 존재이고,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며, 그 초극적(超克的)인 존재, 절대자로서의 존재가 초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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