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부용산과 재일동포’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지사들의 의병활동이 들불처럼 번졌으나 관리들의 무능과 양반들의 탐욕으로 조선은 망하고 만다. 우리가 문명과 문화를 전해주고 일러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옛날에는 풍신수길이 조총을 들고 나타나 금수강산을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1910년에는 이완용 같은 친일파를 앞세워 조선을 집어삼켰다.

임금과 관리들을 믿은 백성들은 왜놈들한테 모든 것을 빼앗겨 살아갈 길이 없어, 만주로 일본으로 떠나야 했다. 그때 일본으로 건너간 동포의 후손들을 재일동포라 한다.

재일동포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과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으로 구별되는데, 민단은 일제가 사형수로 몰았던 ‘박열’등이 조직했다. 1923년에 일본에 어마어마한 지진이 일어나, 당황한 일본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러자 일본은

“조선 놈들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

거짓말을 퍼트려, 일본사람들이 조선인을 때려죽이고 찔러 죽이고 쏴 죽이게 했다.

그때 독립운동을 하던 박열도 붙잡혀서 사형수가 되었는데, 같이 잡힌 여인이 있었다. 금강이 휘감아 도는 부용산의 정기를 받은 일이 있는 카네코 후미코(金文子)라는 여인이었다. 

일본은 침략으로 나라를 발전시키겠다며 모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러다 보니 남아서 일할 사람이 없어 곤란했다. 그러자 일본은

“머리 좋고 솜씨 좋은 조센진을 끌어다 개돼지처럼 부려 먹자.”

조선의 젊은 남녀를 데려다 부려 먹을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끌어갔다. 그리고 공장이나 탄광에 몰아넣고 일만 시켰다. 임금은 모아서 주겠다며 강제로 적금에 들게 하더니, 결국은 떼어먹었다.

일본이 오늘 날 경제대국이라고 뽐내는 것은 그렇게 떼어먹은 돈을 종잣돈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 현 세종시 부강면에서 태어난 김여인도 그때 일본에 끌려가 일본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남자는 딸 카네코 후미코(金子文子)를 호적에도 올리지 않아 무적자로 만들었고, 무적자였기 때문에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남의 집 헛간에서 지내면서 고생하게 했다.
김여인은 일본남자의 폭행에 견디지 못해 카네코를 데리고 집을 나왔으나 살아갈 길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아홉 살이 되는 카네코를 부강에 사는 아버지의 다섯째 딸로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카네코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불러야 했다.

당시의 조선은 친일파가 아닌 사람은 모두 가난했다.

일본 놈들이나 친일파들에게 이것저것 다 빼앗겨 먹고 사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 집에 카네코가 양녀로 들어갔으니 더 어려워졌고, 살기 어려우니 눈치가 심했다. 결국 카네코는 온갖 일을 도맡아서 해야 했다.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빨래를 빠는 것도 카네코 몫이었다.

그렇게 고생을 견디기 어려운 카네코가 하루는 세상이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며 날 뒷산에 올랐다. 금강을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데 강 건너에 아름답게 솟은 부용산이 보였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부용산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고, 용기를 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친족들의 사랑이 없는 부강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으나 다행인 것은 일본인만 다니는‘부강초등학교’에 다니는 일이었다. 그렇게 7년을 살며 17세가 된 1919년에 삼일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은 본 카네코는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부용산의 정기를 받고 깨달은 것이다.

일본에 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고생하고 있었다. 카네코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라는 일본남자 집에 얹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일본남자는

“술집에 팔아먹어야겠다.”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려 했고, 그것을 안 카네코는 동경으로 도망쳐, 신문보급소에 기숙하며 노점상, 가정부, 인쇄소 직공 등 가리지 않고 일하며 고학했다. 

당시 동경에는 조선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카네코는 그들과 어울리며 조선의 장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의열단 활동을 하는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를 읽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짓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 이런 내용의 시를 읽고 감동한 카네코는 박열에게 사랑을 느꼈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여 박열과 같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의 잡지‘흑도’의 편집을 도왔다. 조국의 해방을 꿈꾸는 유지들은 ‘삼일 만세운동과 같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폭력을 동반하는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의열단이나 흑우회 같은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박열과 카네코도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둘은 붙잡혀서 사형수가 되었다.

일본은 일단 카네코를 박열과 갈라놓으려 했다. 카네코의 아버지가 일본 사람이므로 잘못을 인정하면 풀어주겠다며 달랬다. 그러나 카네코는 뜻을 굽히기는커녕

“나도 함께 죽겠다.”

 박열과 같이 죽겠다며 듣지 않았다. 그러다 박열이 사형을 당하면 시신을 거두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옥중에서 혼인을 신고했다. 그래야 박열이 죽으면 시체를 인수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어떻게든 카네코를 살리려고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다. 카네코는 

“박열이 없는 세상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

 박열이 살아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그만, 옥중에서 목을 매달고 말았다. 어릴 때 죽을 생각을 했다가 부용산의 아름다운 자연에 이끌려 살 생각을 했던 카네코가 자살한 것이다.

그런 둘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고, 대한민국 보훈처는 일본인 카네코에게 애국장을 서훈했다.‘박열’이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의병장 임대수라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날도 멀지 않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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