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토착왜구 나망녀’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의병장 임대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고 몸이 튼튼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예의가 발라 동내 어른들을 만나면

“진지 드셨습니까.”

바르게 인사하고 무거운 짊이라도 들고 계시면
이고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
낭랑한 목소리로 시조를 읊으며 짐을 날라 드렸다.

그뿐 만이 아니다. 친구들을 돕는 일도 좋아했다. 같이 뒷산에라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다리가 아프다는 친구가 있기라도 하면 집까지 업어다 주기도 했다.

“장비의 몸을 한 유비다.”

동네 어른들은 임대수를 곧잘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과 비교했다.

그래서 의병장 임대수는 새카만 수염으로 뒤덮인 얼굴에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민족문화대박과사전’의 사진을 보니 그게 아니다.

갓끈을 단정히 맨 갸름한 얼굴이다. 의병장이라기보다는 서재에서 글을 읽는 선비의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양쪽 눈썹의 중간이 망건을 향해 치솟은 것이나 단정히 다문 입술에 어린 미소에는 굳은 기개와 자신감이 어린다. 동지들의 신뢰에 근거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라가 망하는 비극이 없었다면 민족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하는 관리가 되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임대수에 관한 기록을 살피다 가장 안타깝고 화가 나는 것은 1911년에 왜놈을 응징하는 전투를 준비하던 중에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다는데요.”

임대수의 언동을 왜놈에게 고스란히 밀고한 토착왜구가 있었다는 것이다.

토착왜구의 밀고로 왜놈들을 응징하려는 뜻을 충분히 펴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내용을 읽을 때는 누를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밀고가 무엇인가?”

남몰래 넌지시 일러바쳐 이익을 보는 짓을 말하는데, 그것은 당사자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짓이었다. 친하기 때문에 비밀을 알고, 비밀을 알기 때문에 밀고를 하는 것이다. 오직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짓이다. 임대수에게도 그런 밀고자가 있었단다.

밀고를 하는 토착왜구는 왜놈들이 주는 돈으로 편안히 지내겠지만, 밀고를 당한 사람은 몽둥이로 때리고 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해야 한다.

의병장 임대수를 밀고한 자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어 답답하여 눈을 감았더니 토착왜구라는 말과 함께 한 여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녀린 몸에 눈망울이 초롱거리는 여인이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으나 흔들수록 선명해지며 이런 말까지 들린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2년에 태어난 임대수가 13살이 되는 해의 여름이었다.

그날도 서당에서 글을 잘 읽는다고 훈장의 칭찬을 들었다.
기분이 좋은 임대수는 친구들과 금강으로 달려가 물장구치며 놀았다. 그리고 금강에서 잡은 물고기와 조개를 들고 서당으로 돌아가는데, 저쪽 버드나무 아래로 걸어오던 소녀가

“아얏”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놀란 임대수가 달려가 보았더니 이웃마을에 사는 나망녀라는 소녀였다.

소녀는 발갛게 부어오르는 다리를 바라보며 우는데, 버드나무 등걸 위로 뱀이 기어간다. 임대수는 재빨리 소녀를 풀밭에 누이고 빨간 피가 번지는 소녀의 다리를 빨아서 땅에 뱉었다. 그때마다 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그렇게 여러 차례 침을 뱉던 임대수가 소녀를 들쳐 업더니 의원 댁으로 달렸다.

“응급조치를 아주 잘 했구나.”

소녀의 상처를 살펴본 한의사가 칭찬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임대수가 의병활동을 하자, 나망녀는 어떻게든 도우려 했다. 일본군이 어디를 가는지, 마을에 나타난 헌병이 무슨 말을 했는지를 알아다 들려주었다. 그런 도움도 있어, 임대수를 중심으로 하는 의병활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의 헌병과 순경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임대수를 감시했다. 그러다 나망녀를 보기라도 하면

“나상, 반가워요.”

예쁘고 상냥한 그녀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며 나망녀의 곁으로 모여든다. 그리고 사려고 이것저것을 주려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임대수에 관한 것을 묻는다. 그때마다 나망녀는 알려주어도 좋을 것 같은 것을 서툰 일본말로 알려주었다. 그러면 왜인들은

“언제 어디로 출장 가는데, 돌아올 때는 선물을 사오겠다.”

기분 좋게 웃으며 떠들어대는데, 의병활동에 도움이 되는 말도 많았다.

나망녀는 그런 것들을 기억했다 임대수에게 알려주었다. 덕택에 임대수는 지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헌병들을 골탕 먹일 수도 있었다. 당시 농민들은 일본에 속아 농토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런 농민들이 억울하다며 지서나 면사무소를 찾아가 하소연이라도 하면

“조센진이 말이 많다.”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화를 내고 영창에 가둬버린다. 임대수는 그런 사람들을 구해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그녀가 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임대수를 위해 왜인들을 만나더니, 그들이 선물하는 동동구루무를 얼굴에 바르기 시작하면서 변해갔다.

그것만이 아니다. 헐거운 잠방이를 걸친 남루한 조선인보다 제복을 입은 순경과 헌병이 더 멋있다는 말도 해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나상, 나와 결혼해 주시게쓰므니까.”

나망녀를 따라다니던 헌병이 청혼했다. 순간 그녀는 결혼해서 일본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는 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헌병이 선물보따리를 앵기며

“임대수만 처리하면, 결혼해서 일본에 갑시다.”

장래의 계획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망녀는 주저하지 않고

“장군면 태산리에서 전투할 준비를 한데요.”

밀고하고 말았다. 그 결과 임대수는 민족을 해방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이루지 못한 체 왜놈들의 총탄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 글은 실화가 아니며 작가의 상상력이 들어갔음을 알립니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