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제 한 몸의 이익을 놓고 계산하는 삶이 아니라, 사람다움의 가치를 향해 목숨을 던지는 삶이 아닌가! 사랑할 수 있는 것만 사랑하는 게 무어 사랑인가!

사랑 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진짜 사랑인 거야!

문득 사랑을 꿈으로 바꿔본다. 만약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는 것만 꿈꾼다면, 이미 그것은 꿈이 아닐 테다.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을 꾸어야 진정한 꿈이 아니겠는가? 꿈이 되어버린 이 순간에서 꿈을 말하는 것은 슬프다.

지금 굳이 침을, 고인 침을 기울여 연필심에 묻히는 것은, 그 두꺼운 심을 녹이려는 뜻도 있어. 그냥 단맛, 쓴맛, 짠맛을 기억하고 싶어서야. 누구 말마따나, 그래도 그 모든 맛난 것들을 저 혼자 독차지하고 누린 혀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 위하여서야.

실제로 그렇게 혀를, 세파에 굳을 대로 굳어진 혀를 날카롭고 뾰족한 연필 끝으로 찔렀어. 낯선 이 밤에 어린 시절의 많은 일들, 내가 통과해낸 지독했던 날들이 사막에 떨어지는 별똥별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왔어.

그것은 유치하다 싶을 방식으로 과거의 시작을 알렸다. 세월이라고 부를 수 있을 삶의 배경으로써의 시간으로부터 시간을 빼냈다. 그럼 세월로부터 빠져나온 시간, 과거로 훗날 부를 그 시간을 충전하고 있던 감정일 것이다. 그것은 기분을 향한 경악과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분이 묘연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기억할 수 없는, 실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처럼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절에 가봐야 몇 달도 못 버티고 돌아올 거다.”

나중에는 틈을 보였다. 그 길로 입산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절에 찾아와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아들을 보고 돌아가, ‘사흘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울었다’고 했어.

하늘은 금방 무엇이 쏟아지기라도 할 듯 찌푸렸다.

이런 날 혼자 나서는 것은 왠지 가슴이 허허롭다. 약속하지도 않은 동행자가 어디에선가 나타날 것 같아 눈길이 창밖에 자주 머무른다. 뭔지는 모르겠다. 그저 이렇게 한 매듭이 지는 것 같다.

아버지 떠난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정말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의 모든 순간, 순간, 아버지가 같이 하셨다는 걸. 아버지가 유일하게 두려워한 것은 노화 때문에 글 쓰는 능력이 없어지는 거였다.

과거는 아무 의미가 없다. 명성도 아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오직 다음 줄이었다. 다음 줄이 풀려나오지 않는다면 기술적으론 비록 살아 있다 할지라도 죽은 사람이었다.

다행히도 니체와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던 말년에 대해 아버지는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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