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재찬

카페를 뒤로하고 봉준이와 아쉬움의 작별을 했다. 서글픔. 마음이 그대로인데 또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마지막도 아니고 끝도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과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 내게 마감이란 그런 것이다. 마감처럼 손을 들어 친구에게 인사한다.

“또 보자…”

설명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해보겠다는 과감한 선언이나 용기, 집착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여명의 입구 앞에 서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봉준이 앞에서, 다시 내가 자신을 바라본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

지도나 질서 따위로 측량할 수 없는 세상에서 그런 미래들에게 스스로를 비추는 환한 구멍이 있다. 다른 세계의 입구가 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는 채로 멀리 가버리는 봉준이 처럼… 봉준이는 당당하게 사라졌다. 바람이 날고 구름이 피해갔다. 별은 봉준이를 비추었다.

나는 해석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세상은 틀림없이 아름다울 것이라 여기며, 그래 그런 삶도 있겠지 싶은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우리는 균형의 지혜를 갖추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변화는 늘 가능했고, 또 가능해야 한다. 사람들은 현재를 찰나와 같이 스쳐가는 지극히 짧은 순간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지나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는 거대한 공간이 존재한다.

민주정부가 들어서 독재 권력이 자행한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에게 사과와 보‧배상을 하면서 민주화의 첫발을 내디뎠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다른 길을 갔다.

6월 항쟁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나, 민주정부가 들어서지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절망과 분노에 대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서 정권퇴진을 요구했다.

보수 극우세력은 이를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아버지의 마지막 일기는 죽기 일년 전, 내밀한 감정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 가슴에 와 닿는다.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행과 불행이 어떻게 갈리는지 알 것 같다. 무의식이 죽음을 미리예견 했을까.

글에는 유독 죽음이 많이 등장 한다. 친구, 신도, 아버지가 삶을 바친 가까운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으면서 삶의 최종 목적지인 죽음을 차근차근 준비해서였을까….

하지만, 지금 흘리는 눈물과 절규, 그 하나하나가 끝내 이기고야 마는, 그리하여 진실의 열매를 맺고야 마는 씨앗이라 굳게 믿는다.

아버지가 뿌린 씨앗이 땀 흘린 만큼 거두는 것처럼, 옳은 것이 이기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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