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의병대장 임대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금강의 도도한 물줄기를 내려다보는 곳에, 고려의 망국을 애통해 하며 낙향하다 전월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다는 임난수의 덕을 기리는 독락정이 있다.

일대를 ‘나릿재 역사공원’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지금은 ‘나성동 독락정 역사공원’이라 한다.

뒤로는 세계의 중심을 실현하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라 살벌하기도 하지만, 의병장 임대수의 공적비가 서있어 숙연하다.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투사들의 심정으로 미래로 설계하는 자에게 방향을 알려 주는 것 같다.

의병장 임대수는 꺼져가는 조국을 지키려고 항거했던 애국지사이다.

그로 인해 연기 지역에서는 일본에 항거하는 의 열사가 줄을 이었고, 3,1 운동이나 독립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 이의 결실로 해방을 맞이하여 오늘 우리를 있게 해주었다.

그는 1911년 6월 16일 공주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전사ㄹ하여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1982년 6월 1일에 공주 조기탁 군수의 도움우로 공주 장기면 금암리 공원묘지에 이장되었고 1997년 10월 16일 대전국립묘지에 이장되셨다.

그러나 우리 연기군내에서는 그의 업적이나 행적을 표기한 유적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군내 뜻있는 분과 단체가 그의 업적을 기리자는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야 1999년 8월 15일 광복적절을 기하여 임대수 생가 입구인 이곳에 삼가 공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추진위원장 강정현(금남농업협동조합장)
추진부위원장 강영(조치원문화원장), 임창철(종촌벽돌공장대표)

추진단체

연기향토사연구소(소장 정해영), 연기군노인회(회장 이상은), 연기군시우회(회장 유진숙),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연기군협의회(회장 오운교), 안동김씨연기종친회(회장 김해연), 문화류씨치원공종중(회장 류기선), 조치원신용협동조합(이사장 이기봉), 농협중앙회연기군지부(지부장 최종구), 전의농업협동조합(조합장 홍종원). 남면농업협동조합(조합장 정창규). 바르게살기운동금남면위원회(회장 이장규), 서면이장단협의회(회장 홍성욱). 남면이장단협의회(회장 임만수), 서면남여새마을협의회(회장 홍순범,김남기), 남면남여새마을협의회(회장 황정의, 김순의), 금남선우회(회장 최형석)

“엄마, 의병장이 뭐야?”

독락정을 둘러보고 나오던 아이가 ‘의병장 임대수 공적비’ 옆에 서있는 안내판을 읽은 다음에 엄마에게 묻자, 젊은 엄마는 기특하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응, 나라가 외적이 침략을 받아 어려울 때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적을 물리치려는 사람들 을 이끄는 분이란다.”

아이는 어머니의 설명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적비 돌아가더니

“엄마 이쪽에는 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어요. 제가 읽어 드릴게요.”

공적비 뒤편에 새겨진 의병장 임대수의 공적을 읽는다.

의병장 임대수(1881년 2월 12일〜1911년 6월 16일)는 부안인(扶安人)이다.

고려 후기 연기 입향 시조인 공조전서 난수(蘭秀)의 19대손으로 충남 연기군 남면 송담리 표석동에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학수(學洙)이고 자는 호경(浩京)으로, 어려서부터 정의심이 강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해 항거 투쟁할 것을 결심하였고 1907년 정미 7조약이 늑결된 후, 구한국군 마저 해산되자, 그는 공주 당암의 동지 권정남과 의병 100여명을 모집하고 전의 소정역을 습격하여 일본군과 첫 싸움을 벌였다.

그 후 직산 경무소 은진, 정산동의 일본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1908년에는 당진 청양 비인 한산 임천면 천신창 아산 평택 등지의 19개군을 돌면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구속된 수백인의 의(義)지사(志士)를 구출하기도 하였다.

1911년 6월16일)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에서 임대수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애국지사이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을 높이 평가하시어 1980년 8월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1990년에 12월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훈서하였으며, 남면 종촌리에 손자 임정묵이 살고 있다.

1999년 8월 15일
글지은이 康洙鉉, 글쓴이 金在山(료제공 광복회)

“엄마, 그런데 너무 어려워요. 읽기는 했는데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는 말이 너무 많아요.”
“그래,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서 공적비에 무슨 글이 새겨져 있는지 알아야 겠지. ”

엄마는 유치원생 같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공부를 잘하자는 말은 잊지 않았다.

행복한 모자가 민족의 자존심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시다 돌아가신 의병장 임대수의 행적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니,

“나라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저렇게 보장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1911년에, 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에서 전투를 준비하다가, 누군가의 밀고에 의해 본격적인 전투를 하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는 말도 있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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