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조치원의 배꽃’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옛날에는 붉은 복사꽃이 지고나 서야 하얀 배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은 복숭아꽃과 배꽃이 같이 피며 세상을 향기롭게 한다.

“기후가 변한 탓이야.”

옛날에 비해 따뜻해졌다며 온난화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하기는 동해에서 잡히던 오징어가 서해에서 잡히는가 하면 남쪽에서만 열리던 감을 북방에서도 따먹을 수 있다지 않는가. 그것뿐인가. 아열대 작물인 파파야, 망고, 바나나 같은 것들을 중부지역에서 재배한다고 자랑하는 소리도 심심찮게 듣는다.

조치원에는 원래 꽃이 많다.
그래서 새들이 즐겨서 둥지를 틀고, 한 번 들린 신들은 자연에 끌려 떠나지 못하고, 온갖 선행을 베풀며 모두가 원하는 꿈이 이루어지는 씨를 뿌린단다. 그런 소문을 곤륜산의 서왕모가 들었다.

저수지와 강이 아름답게 어울린 곳에 황금 대리석의 궁전을 짓고 사는 서왕모는 착한 자에게 복을 주는 것을 좋아했다. 선한 사람을 만나면 소원이 다 이루어지게 하는 복숭아를 준단다.

그 서왕모가 살기 좋은 조치원이라는 소문을 듣고 내려다 본 후로 조치원에는 복사꽃 천국이 되었다. 어느 해의 일이었다. 아름다운 복사꽃에 이끌려 내려온 서왕모가 이리저리 거닐다

“배꽃과 같이 피면 더 아름답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이후로 복사꽃과 배꽃은 같이 피기 시작했다.

원래 붉은 것과 흰 것은 같다. 어둠을 밝히며 떠오르는 붉을 태양이 하얀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흰 옷을 입고 태양을 숭배하며 백의민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얀 배꽃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옛날일이 생각나는 것도 그래서다. 

한 그루 배나무 꽃 핀 아래 섰더니, 두견새 한밤에 울어예는 봄밤에
배나무 배꽃이 활짝 피어난대요
하이양 배꽃을 바라보노라면
시집 간 누나가 사못 그리워져요
배꽃 같이 하얀 얼굴 까아만 두 눈썹
소곤소곤 옛이야기 들려주면서
어린 나를 꿈나라로 그 옛날에도
두견새 울어 배꽃이 활짝 피었대요.

어떤 시인이 읊었다는 시와 더불어 배나무 아래에 앉아서 풀꽃을 보던 누님과 그 누님 주위를 맴돌던 뒷집 형까지 생각나는 것도, 배꽃이 하얗기 때문이다.

그 형은 누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도 눈이라도 마주치면 뒤돌아서 붉어진 얼굴을 흰 배꽃에 반사시키곤 했다. 한 번은 엉뚱하게도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하야, 잠 못 드러 하노라. 

고려시대의 이조년이 읊었다는 시조를 읊조리며 누나 곁으로 다가갔다.

그때였다. 흰 꽃이 만발한 배나무 아래에 수북이 자란 풀밭의 냉이꽃 민들레꽃을 바라보며 코를 갖다 대던 누나가

“애고머니나”

꽃을 찾아 날아온 노랑나비를 쫓다가 옆으로 쓰러진다. 순간 형이 달려가 서둘러  누나의 어깨를 들어 올리는데,

“아야야,”

왼손으로 오른 팔목을 잡은 누나가 비명을 지른다.

“팔을 삐었구먼.”    

형이 팔을 움츠리는 누나를 풀밭에 눕히더니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풀밭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서둘러 쑥을 뜯어 넓적한 돌 위에 올려놓고 짓이기더니, 질척해진 쑥을 누나의 팔목에 붙인다.

“앗, 차거”

누나는 엄살 섞인 비명을 지른다. 그런데도 형은 침착하게 허리띠로 팔을 둘둘 말더니 누나를 지게에 지고 배꽃이 만발한 길을 달려 아랫마을로 향한다. 내가 그 뒤를 따라가는데

노랑나비 한마리가 하늘하늘
춤을 추며 날아다닌다
하얀 꽃잎이 햇빛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지게 위에 걸터앉은 누나가 배시시 웃는다. 하늘거리는 나비를 보고 그런지 하얀 배꽃을 보고 그런지는 지게를 타고 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누님은 계속해서 미소짓는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인근 마을에는

배꽃을 쫓는 나비를 쫓아다니면
천자님이 품에 안고 날으신다네 
의미가 분명하지 않는 노래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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