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덕대’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부용 마을 입구에는 150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가 서있고, 은행나무 옆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덕대라는 원시적 장례식의 유래가 적혀 있다.

장승 옆에 큰 소나무가 있었는데 아이가 죽으면 가마니에 싸서 매달아 놓는 것을 덕대라 한다. 돌림병으로 죽은 아이를 매달아 놓은 것을 새가 쪼아, 병을 멀리 날려 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 덕대란 비바람이나 들짐승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널이나 막대기를 나뭇가지나 기둥 사이에 얹어 만든 선반에, 사체를 올려놓고 용마름으로 덮는 장례였다.

사체를 선반에 올려놓는 것은 짐승들로부터 보호하는 방법이고, 용마름으로 덮는 것은 새들의 접근을 기대하는 일이었다. 짐승들이 사체를 해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지만 죽은 아이의 영혼을 극락으로 운반한다는 새들이 날아오는 것을 바라는 장례 방법이었다.

덕대의 설명은 장승과 소나무가 같이 서 있었다는 사실과 같이 이야기 되는데, 그 소나무가 150년이나 살았다는 은행나무와 같은 나이인지, 아니면 그 더 오래 살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마을 어귀에 신의 강림을 비는 소나무 은행나무 장승 등이 서 있었다는 것, 마을 사람들이 하늘의 뜻을 존중하며 살았다는 것이다.

마을 어귀에 신의 강림을 비는 주물들이 나무나 장승, 그리고 덕대의 형태로 세워졌다는 것은 그 마을이 사람들의 소원을 빌고 죽은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에 알맞은 곳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그곳이 신과 인간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생사가 갈리는 장소, 그리고 이승과 저승이 연결되는 길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용봉에 명당이 있다는 것이다.

북으로 흐르던 물길이 이곳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신의 뜻이 아니면 물줄기가 그 앞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휘돌아 흐를 수 없다.

신무산의 뜬봉샘에서 시작된 금강이 거쳐 온 옥천에서는 3500년 전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볍씨가 발견되고, 부용 마을에 덕대의 유래가 전한다는 것은 아주 옛날부터 문명이 번성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일이다.

덕대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이승에 태어나 충분히 살아보지도 못하고 요절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떠나야 하는 영혼에 대한 배려였다. 요절에 의한 미련은 환생으로 풀 수밖에 없다. 생의 미련을 풀지 못하면 원혼이 되어 구천을 헤매게 된다. 그런 미련을 풀어주는 방법의 하나가 덕대다. 덕대에 놓인 사체를 떠나지 못하는 영혼이

“부모에게 효도도 못하고, 혼인하여 자식도 낳아보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

신세를 한탄하면, 그 소리를 들은 새들이, 그것을 신들에게 전한다. 그러면 신들은

“요절한 영혼을 아이를 원하는 집에 보내도록 하라.”

요절한 영혼을,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집에 환생시키는 방법으로, 모두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한다.

혼인하여 10년이 지나도 아이를 갖지 못하던 부부가 갑자기 회임하거나, 환갑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던 할머니가 아이를 낳았다며 할아버지가 춤을 추는 일이 간혹 가다 있는 데, 그것은 모두 신들의 중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요절한 아이의 영혼이 덕대를 찾아온 새에게
 
“나도 한 세상 살아보고 싶습니다.”

라고 말한 소원이 이루어 졌고, 아이를 원하는 자가 거목이나 거암, 장승이나 솟대, 뒷산의 돌탑을 찾아다니며 정성을 다하여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신들이 양쪽의 소원을 들어준 것이다.

그래서 마을의 돌림병을 다른 곳으로 날려 보내기 위해 덕대를 세운 것처럼 말하는 설명은 옳지 않다. 자기 마을의 역병을 다른 마을로 보낸다는 것은, 나의 행복을 위해 남을 불행하게 하는 일로 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죽음은 피할 수도 있단다. 본인이나 가족이 염원하면 죽어야 하는 사람이 살기도 한단다.
옛날에 부용마을 지나던 노인이 팽이를 치며 노는 아이를 바라보더니

“사흘 안에 죽겠다.”

곧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들은 부모가 노인을 붙잡고,
 
“죽는 날을 안다는 것은 살게 하는 방법도 안다는 것 아니오!”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노인은

“장승에게 음식을 바치고 아들에게 절을 하게 하시오.”

죽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모는 노인이 시킨 대로 했더니, 아이는 절을 하면서

“태어나 지은 죄도 없는데 죽는 것은 억울합니다. 저도 한번 살아보고 싶습니다.”

쉬지 않고 절을 하며 사흘을 비는데, 지는 해를 등에 진 일곱 노인이 나타나서 차려논 음식을 들며 환담을 나누다 새벽녘에 일어나면서

“아이의 정성이 갸륵하지 않소.”

정성을 다하여 절하는 소년을 칭찬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꺼낸 살생부의 10을 긋고 99로 고쳐 쓴 다음에 동구 밖으로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금성이 반짝거렸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떤 젊은이가 자다가 눈을 떠보니 검은 갓을 쓴 염라대왕의 사자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놀란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아랫목에 사자를 앉히고 절을 하며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먼저 술 한 잔 드시지요.”

서둘러 광에서 퍼온 술을 권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사자가 거듭되는 권에 못 이겨 살짝 입에 대더니, 맛있다며 주는 대로 마신다. 그리고 흥이 오르자 품속에서 꺼낸 살생부의 19를 99로 고쳤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이는 흰 수염이 바람에 휘날릴 때까지 살았단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