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여자산’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흰 구름이 두둥실거리는 맑은 하늘에 햇빛이 번쩍거리더니, 하얀 백마 한 마리가 날아 내리는 데, 잘 생긴 신이 타고 있다. 신이 산봉우리에 내리자 말은 “히힝”하고 세 번 울더니 하얀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천제의 명으로 이곳에 천하를 열겠다.”

말에서 내린 천신이 몰려든 신과 인간들을 바라보며, 부용산 자락에 천하를 열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맑게 흐르는 물 위를 걷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한 방울의 물도 튀지 않는다. 마치 얼음 위를 걸어가는 것 같았다.

물 위를 걸어 미호천이 합류하는 곳까지 걸어가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푸우”하고 내뿜는다. 순간 부용산에 오색무지개가 걸린다.

“나는 천신 한곤이라 합니다. 모습을 보이시지요.”

천신이 이름을 밝히며 누군가를 부른다. 그러자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낭자 하나가 오색무지개 아래를 걸어서 나오지 않는가.

“함께 천하를 열고 싶어 내려왔소이다.”

낭자를 본 한곤이 천하를 같이 열자는 말을 했는데, 그것은 신들이 하는 청혼이었다.

그럴 경우 대개의 여신은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부용산 자락의 여신은 어찌 된 일인지 미소만 지을 뿐, 아무런 답이 없다. 그렇다고 돌아서지도 않아 침묵만 흐른다.

“어떻게 나의 청혼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침묵이 오래 지속되자, 한곤의 얼굴이 붉어진다. 창피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낭자가 한곤을 향해

“당신을 따르는 것들이 있거든 강가에 세워보세요.”

천신이 얼마나 많은 부하를 동원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보겠다며 강변으로 걸어간다.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요”

그때서야 안심한 한곤이 하늘을 향해 세 번, 부용산을 향해 일곱 번 박수를 친 다음에

“모두들 강변에 모이도록 하라.”

누구라는 지칭도 없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토끼 여우 멧돼지 노루 호랑이 다람쥐 등이 산에서 뛰어나오고, 들에서 놀던 소 말 돼지는 물론, 땅속의 쥐 고슴도치까지 달려와서 늘어서는데 끝이 안 보인다.

“제법 긴 줄이 생겼네요.”

여신이 늘어선 동물들을 힐끗 보더니 희고 고운 손을 강물에 담그며

“모두들 떠오르거라.”

나지막이 속삭이자 물고기들이 비늘을 보이며 늘어서는데, 수초 사이를 헤엄치던 붕어, 모래 속에서 낮잠을 즐기던 모래묻이, 바위틈에서 흰 수염을 매만지던 매기까지 떠올라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끝이 보이질 않는다.

“어느 쪽이 긴지 확인해 볼까요.”

여신이 물고기들의 등 위에 올라 사뿐 사뿐 걸으며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센다. 한곤도 줄을 선 짐승들의 등 위를 걸으며 여신에 맞추어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신이 짐승과 물고기의 등 위를 걸으며 세는데 끝이 없다. 합강에서 출발하여 장남평야와 매봉자락을 지날 때까지 세었는데도 그치지 않더니, 석장리에 이르러서야 짐승의 줄이 그친다. 그런데도 물고기의 줄은 끝이 안 보인다.

“내가 졌소이다.”

한곤이 얼굴을 붉히며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분한지

“저 구름을 움직여 보겠소,”

하늘의 흰 구름을 향해 손을 휘젖자, 구름이 꽃으로 변하기도 하고 동물로 변하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그것을 보던 여신이 또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고

“후우”

하고 입김을 길게 내뿜는다. 그러자 입을 나간 입김이 돌풍으로 변하며 삽시간에 하늘의 구름을 흩뜨리고 만다. 그것을 본 한곤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또 졌소이다.”

패배를 인정하며 주저앉는데 안쓰러웠다. 그러지 여신이 미소하며

“부용이 천신의 강림을 기다린지 오래랍니다.”

비로소 이름을 밝히며 한곤에게 다가선다. 신의 세계에서는 남신이 여신을 찾아가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고, 이름을 묻는 것은 청혼하는 일이었다.

그때 여신이 얼굴을 보이는 것은 관심을 보이는 일이고, 이름을 대는 것은 혼인을 수용하는 일이었다.

주술 시합에 지고도 부용이라는 이름을 들은 한곤은 기뻐하며 부용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이서 신과 인간들이 행복한 천하를 부용산에 열었고, 신과 인간들은 둘이 혼인을 맺고 사는 산을‘여자산’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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