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부용산의 여신 숙정양(肅正梁)’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북진하던 물줄기가 부용산 자락에서 서남으로 방향을 바꿔 흐르면서 주변의 경관은 나날이 변해갔다. 널따란 들만이 아니라 언덕과 산처럼 높은 곳도 매일 같이 침식되며 변해갔다.

그렇지 않아도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났었는데, 강물까지 흐르며 장관을 이루자

구름을 타고 찾아오는 신
바람을 타고 찾아오는 신
산을 넘어서 찾아온 인간
들을 달리고 달려온 인간

그리고 놀라서 도망쳤다 돌아오는 신과 인간들이 같이 어울려 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잘 났다.”
“아니다. 내가 최고다.”

서로 잘났다며 뻐기는 바람에 다툼이 잦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도술 경쟁이나 말다툼이 해질녘까지 계속되는 일이 잦아지더니, 나중에는 횃불까지 들고 나와 다툰다. 그러다 보니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는 일이 많은가 하면, 이웃집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늘어났다.

“두고만 볼 수는 일이오.”

혼란해지는 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한곤과 숙정양이 소란스러운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한곤이 낭랑한 목소리로 노래하면 숙정양이 노랫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처음에는 다투느라 눈길도 주지 않았지만, 둘은 쉬지 않고 소란스러운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한곤이 목을 가다듬고

하늘에 밝게 뜬 해가 천지를 대워주고
휘영청 밝은 달이 광속에 흔들거린다
나날이 변하는 부용산 자락을 보세요

나날이 아름답게 변해가는 산천을 노래하면 숙정양이 옷자락을 살포시 흔들며 춤을 춘다. 그 가락과 선율이 사방으로 퍼지면 하늘에서 둥실거리는 구름이 강물에 비친다.

그런데도 신과 인간들은 다툼을 멈추지 않았고, 한곤과 숙정양도 소란스러운 곳을 찾아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한곤이 지친 기색도 없이 맑은 목소리로
 
세모신은 풍우의 조절에 능란하시고
네모신은 산중의 짐승을 잘 다루시고
둥근신은 물속의 고기와 잘 노십니다

모두의 재주를 칭송하면 숙정양이 춤을 춘다. 그 가락과 선율이 얼마나 조화로운지, 못본척 하던 그들도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씩 따라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 같더니, 나중에는 모두가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춘다.

그러면서 다투는 소리가 잦아드는 대신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가다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가 하면

“자네의 도술이 최고일세.”
“아닐세, 자네야 말로 최고지.”

서로가 칭송하며 웃어대며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려 했고 즐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기뻐했다. 드디어 서로 화합하고 같이 즐기는 평화를 되찾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배 한 척이 강물을 거슬러 오는데, 유달리 키가 작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풀잎으로 허리를 가렸을 뿐 발가벗은 그들이 배에서 내려 엎드리더니

“우리는 동쪽 바다에 있는 섬에 살고 있습니다만, 얼마 전부터 밤마다 악귀가 나타나 닥치는 대로 죽입니다. 제발 저희들이 편안히 살게 해주세요.”

편안히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난쟁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한곤이

“안됐구나.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자세한 것을 알아야 도와줄 수 있다며 물었다.

“서너 달 전부터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신들이 나타나 닥치는 대로 해치기 때문에 어두워면 굴속에 들어가 해가 뜰 때까지 꼼짝도 못한답니다.”

왜인은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생각만 해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원래 ‘한곤’은 하늘과 땅으로 구성된 세상(漢)에서 하늘을 대신해서 평화로는 지상(坤)을 만들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악귀의 만행을 두고 볼 수 없는 한곤이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본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동방에 있다는 섬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한곤의 마음을 읽은 숙정양이 앞에 나서며

“밤의 일이라 하니, 내가 가겠습니다.”

밤의 세계에 익숙한 숙정양이 몸소 처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곤도 어둠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숙정양이 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가도록 하시오.”

암흑을 통치하는 방법을 기록한 장부 한 권을 건넨다. 그러고도 마음이 걸린 듯

“황후, 나 좀 봅시다.”

숙정양의 손을 잡고 보물창고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이것은 어둠을 밝히는 거울이고
이것은 마음을 순화하는 옥이고
이것은 악귀를 몰아내는 검이오
세 가지의 보물을 황금상자에 담아서 건넨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