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모각이 들려준 독도 이야기(2)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조선은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기 때문에 죽도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일본의 어민들은 울릉도에서 안용복을 납치하더니, 죽도가 일본의 섬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남인들은

“울릉도는 조선의 섬이고 죽도는 일본의 섬이다.”

라는 사기적 국서를, 당시 일본 외교를 전담한 대마번에 건네, 울릉도만이 아니라 독도까지 일본에 건네 줄 뻔했다. 숙종이 총애하는 장희빈을 따르던 남인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잘 되려고 그랬는지, 숙종의 장희빈에 대한 총애가 식으며 남인들이 권좌에서 물러나고 남구만을 비롯한 서인이 대신하게 되었다. 남구만이라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라는 시로 유명한 정치가다. 처음의 남구만은 동해의 사정에 밝지 않았는지, 대마도의 농간에 놀아날 뻔했다. 그러다

“대마도가 막부의 뜻을 속이고 울릉도를 침탈하려 합니다.”

일본에 납치되었다 돌아온 안용복이 제공한 정보를 전해 듣자, 부산 첨사를 시켜 자초지종을 조사하게 했다. 그때 안용복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일본이 말하는 죽도는 조선의 울릉도입니다. 조선인이 조선의 섬에서 어렵을 하는데 납치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라고 일본인들에게 따졌다. 그런데 죽도가 조선의 울릉도라는 것은 일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을 다스리는 장군 덕천강길(德川綱吉)은 전쟁보다 평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어찌 된 일인지 조사하여 보고하라.”

안용복을 납치했다는 보고를 받은 장군이 조취번에 조사하여 보고할 것을 지시했고, 조취번은 죽도에 건너다니는 어민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은 다음에

“죽도와 송도는 조선에서 가까운 섬으로, 조선의 울릉도와 자산도라고 합니다.”

송도와 죽도가 일본의 섬이 아니라 조선의 섬이라고 보고했고, 장군은

“그렇다면 울릉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증서를 주어서 돌려보내라.”
안용복에게 죽도가 조선의 땅이라는 증서까지 써주었다.

그것을 대마번이 중간에서 가로챈 다음에, 일본의 죽도에 조선인이 건너다니면 안 된다고 장군이 말한 것처럼 조선에 전했다.

안용복이 그런 대마번의 음모를 잘 알기 때문에 보고하려 했으나, 만나 주는 관리가 없었다. 그러더니 남인 정권은 예조참판 권해에게

“울릉도는 조선 땅이고 죽도는 일본 땅이다.”
라는 국서를 작성하여, 대마번에 건네고, 안용복을 2년형에 처했다.

그런데 단군 할아버지가 독도를 지켜주실 생각이셨는지, 장희빈과 남인들의 음모가 탄로 나, 남구만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남구만의 추천으로 접위관이 된 유집일이, 동래부에 갇혀있는 안용복을 만나, 대마번이 장군의 뜻을 왜곡하며, 울릉도가 일본의 죽도라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남구만에게 보고했다.

“대마도가 그렇게까지 사실을 왜곡하는 줄은 몰랐다.”

유집일을 통해 안용복이 제공한 정보를 들은 남구만이 크게 놀라며.

“대마도가 아닌 다른 곳을 통해 우리의 뜻을 장군에게 전해야 한다.”

대마번을 제외하는 외교정책을 구상하고, 대마번을 상대하는 접위관 유집일에게

“남인들이 건넸던 국서를 회수하도록 하시오.”

이미 건넨 국서를 회수하게 했다. 대마도는 돌려주지 않으려 했으나 남구만의 뜻이 워낙 강하다는 것을 알자, 어쩔 수 없이 반환했다. 그러자 남구만은

“일본이 말하는 죽도는 조선의 울릉도다.”

라는 내용의 국서를 새로 작성해서 건네주고 협상을 종결시켰다. 그러자 대마번의 사자는
“이러면 전쟁이 나고, 전쟁이 나면 조선은 망하고 만다.”

무려 아홉 달이나 돌아가지도 않고 악담을 해대며 협상을 다시 하자고 졸랐다. 그러는 사이에 대마도의 전 도주인 종의진(宗義眞)은 강호로 장군을 찾아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서 죽도를 빼앗아야 합니다.”

전쟁을 해서라도 죽도(울릉도)를 빼앗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장군은

“원래 죽도가 우리의 섬이 아니고 일본인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일본인이 건너다니지 않으면 다툴 이유가 없다. 전쟁까지 하자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대마번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1696년 1월 28일에

“앞으로 일본인들이 죽도에 건너다니는 것을 금한다.”

일본인들이 죽도에 건너다니는 것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며 조선에 알리라 했다. 그런데도 대마번은 그것을 조선에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의 장군이 일본인들의 죽도 왕래를 금지시킨 사실을 알지 못한 남구만이 안용복을 불러

“조취번을 방문하여 대마번의 비리를 막부에 고발하시오.”

안용복에게 밀명을 주어 조취번에 파견했고, 안용복은 조취번을 방문하여 대마번의 비리를 장군에게 고발했다.

안용복 일행 11인이 조취번을 방문하자, 조취번은 조선의 사절단이 왔다며 크게 환영하며, 안용복이 제출한 고발장을 막부에 전했다. 그렇게 되자 대마번은 어쩔 수 없이, 장군이 일본인들이 죽도에 왕래를 금지시킨 사실을 조선에 알리면서

“우리가 장군에게 죽도는 조선의 울릉도라고 말한 결과입니다.”

라고 또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도 조정대신들은

“대마번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대마번에 감사해야 한다고 온갖 소란을 떨며

“안용복을 죽여야 합니다.”

안용복이 조취번을 방문하여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울릉도와 자산도라고 주장한 것이 죄라며 사형시켜야 한다며 난리를 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화낸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숙종은 안용복의 공을 설명하는 남구만의 뜻에 따라 죽이지는 않고 귀양을 보냈다. 참으로 억울한 안용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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