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일화’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세계 4대 성인중의 한분인 공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공자의 또 다른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라고 하는데, 이 땅에 아직 남아있는 유교사상의 시조(始祖)라고 한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에서 하급귀족의 무사인 숙량흘(70세)과 안징재(16세)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는 3살 때 아버지와, 17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19살 때 송나라 여인과 결혼했고, 계(季)씨 가문 창고지기와 가축 사육일도 했지만 중도(中都)지역을 다스리는 책임자로 사공(司空)과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관제와 예법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예(禮)와 인(仁)의 전문가로 유명해져 있었다. 이시기에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맞아 나라와 사상이 난립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다.

노(魯)나라에서도 내란에다 반란까지 겹치자 어쩔 수 없이 공자도 제나라로 망명 아닌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제나라 한 고을의 뽕나무 밭을 지나면서 나무위에서 뽕을 따고 있는 두 여자를 만난다.

동쪽가지의 여자는 아주 곱고 예뻤으나 또 다른 반대쪽의 여자는 얼굴이 얽고 너무 못생긴 터라.

공자가 농하기를 “동지 박(東枝璞)! 서지 박(西枝縛)! 이로고” 하는 것이다.(이 뜻은 동쪽가지는 구슬 박 이고 서쪽가지는 얽을 박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또, “에이 구, 어찌 저리도 박색일꼬!”라고 탄식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서쪽가지의 여자가 공자를 힐끗 쳐다 보더니, 이렇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었다.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 천하명문지상(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 天下名文之相)이로다!”하면서 깔깔깔 웃는 것이었다. (이 뜻은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툭 튀어 나온 게 7일간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흰걸 보니 문장만큼은 천하에 잘 알려질 만 하겠구나. 그렇지만 언젠가는 나를 다시 찾아올 수밖에 없을 거라며 조롱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공자가 코웃음을 치며 “내가 무슨 일로 너를 다시 찾을 고? 그런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곳을 떠나갔다.

그런 일이 있고난 얼마 후에, 공자 일행은 어느 고을을 지나가다가 마치 난(亂)을 일으키고 도망치는 사람들로 오해를 받아 관아로 끌려갔다.

공자는 포졸들에게 여보시오! 내가 노나라 사람 공 아무개요! 아무리 말을 해도 아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역도로 몰려 죽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공자일행이 하도 억울함을 호소하니 “만약에, 당신이 노나라 성현 공자라면, 보통사람과 다른 비범함이 있을 것인즉, 내가 문제를 낼 테니 한번 풀어보라.”고 하는 것이다.
단, 일주일의 시간을 줄 테니 구곡주(九曲株: 아홉 개 굴곡이 있는 구슬)에 실을 겹치지 않도록 꿰어 보라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이것을 꿰지 못한다면 모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공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과 머리를 짜내, 실을 꿰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시간만 자꾸 지나가고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자는 목숨이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그 뽕나무밭의 박색인 처자를 떠 올렸다. 결국 일행 중 한 명을 그 처자를 찾기 위해 보냈는데, 제자가 다녀와서는 여인은 간데없고 짚신만 거꾸로 뽕나무에 걸려 있었다고 소식을 전한다.

그 소식을 접한 공자가 무릎을 탁치며 제자에게 이르되 “계혜촌(繫鞋村)을 찾아가 보아라.”라고 한다.

제자가 우여곡절 끝에 계혜촌에서 그 여인을 찾아 구슬 꿰는 가르침을 청하자. 그 여인은 말없이 양피지에 ‘밀의사’(蜜蟻絲)라는 글자를 적어 높은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한다.

제자로부터 글귀를 받은 공자가 탄복하며, 꿀과 실, 그리고 개미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여 개미허리에 실을 묶고 반대편 구슬구멍에 꿀을 발라 뒀더니 하룻밤 사이 개미가 구슬을 다 꿰어 놓았던 것이다.

그날은 공자가 밥한 끼 못 먹고 굶은 지 바로 칠 일째 되는 날 이었다.

공자가 옥문을 나서며 “격물치지(格物致知)”라며 혼자말로 중얼거린다.(이 뜻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함에 참! 지식에 통달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후, 자신의 오만 방자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친 공자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왜? 구멍이 다섯도 일곱도 아닌, 아홉 개 뚫린 구슬을 나에게 주었을까!

공자는 나이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달았다는데, 인생이란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지고 태어나서 두 눈으로 바로 보고, 두 귀로 바로 듣고, 두 코로 향내를 감지하고, 입으로는 정갈하게 먹고 진실(眞實)되게 말하며, 두 구멍으로는 배설 하는데 막힘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무리 없이 삶을 이어가는 기본이요, 하늘의 도리(道理)가 아닐까 하는,
즉,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천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이후 공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하여 “나이 70을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말할 때 공자의 논어(論語)에서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하여 ‘지학(志學)’이라하고, 20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 이라고 부른다.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 ‘이립(而立)’이라하고,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불혹(不惑)’이라 한다는 것이다.

또한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하여 ‘지천명(知天命)’이라 하고,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한다 하여 ‘이순(耳順)’이라고 부른다.

앞에서 거론했듯이 70세를 공자가 편찬한 논어에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를 줄여 ‘종심’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이 대중적으로 흔히 쓰는 ‘고희(古稀)’의 단어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보통 칠순잔치의 존칭어를 ‘고희연(古稀宴)’이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세월이 굉장히 빠르다는 말을 많이 한다.

자기가 먹은 나이만큼의 속도로 스쳐 간다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나이 자랑 혹은 나이 탓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 고귀한 뜻도 하늘의 섭리(攝理)라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쏜살처럼 스쳐가는 세월을 따라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세월을 잡는 방법이 있다고 한다

어느 날 내공이 깊으신 신학자는 1초(秒)를 다스릴 줄 알아야 도망가는 세월을 잡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1초(秒) 단위로 생각하고, 계획하고, 깨닫고, 행(實踐)하는 자들만이 쏜살같이 스쳐가는 세월을 따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또한 구곡주(九曲珠)를 꿰는 지혜라니! 한번 곱씹어 볼만 하지 않는가! 아무튼 새해를 맞이했으니 독자(讀者)여러분들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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