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 ‘정려각’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연기군 서면의 쌍류초등학교 앞으로 흐르는 내를 따라 오른 송암 마을에 정자 하나가 서있다. 돌계단을 올라 살펴보니,

“효자 김한정을 1882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제수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리는 정려문을 세워도 좋다는 것을 허가한다.”

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석비가 서있다. 효를 중시하는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산세가 포근하여 감싸이고 싶어진다.

월하천이 시작되는 청라리에서 태어난 김한정이 19세가 되는 해에 부모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부인과 같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며 봉양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에게는 영지버섯을 달여드리고 모친에게는 생선을 고와드려야 한다.

김한정 부부의 정성에 감동한 산신이 꿈에 나타나, 병을 낫게 하는 처방을 일러주었다. 그날부터 부부는 뒷산에 영지버섯을 가꾸고 집 앞을 흐르는 내에는 고기를 길러 부모님을 20년 넘게 봉양하여 이웃 나들이도 하시다 돌아가셨다.

“우리 고을의 자랑이다.”

김한정의 효성에 감동한 유림들은 그 사실을 왕에게 알렸고, 왕은 참판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부부의 효성이 유림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조선은 왕에게 충성을 다 하는 충신이나, 부모를 잘 모시는 효자와 효녀, 남편의 뜻을 잘 받드는 열녀가 있으면, 동네 어귀에 정문을 세워 칭송하게 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본받으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씨는 이 대감의 후손으로 19세에 박참판의 아들에게 출가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 하던 중, 남편이 앓아눕자 정성껏 간호했다. 그러다 남편이 죽자 살려내지 못한 책임을 느끼고 목을 매어, 26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남편 곁으로 갔다.”

라는 이야기나

“아버지를 모신 산소 곁에 초막을 짓고 3년이나 슬퍼하다 죽었다.”

와 같은 이야기가 미담으로 펴져 나갔다. 조선이 유교에 따른 선행을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에게는 그렇게 여인이나 어린아이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이야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 느끼는 것이 더 많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일은 민족의 치욕인데, 해방되자 민족끼리 싸우는 6,25 동란이라는 역사까지 만들고 말았다.

그 바람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헐벗고 굶주려야 했던가.
그 끔찍한 동란에 징발된 청년 하나는, 백마고지에서 싸우다 전사하여 동작동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호적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가 전사한 후에 태어난 유복자는 유가족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책가방 대신에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려 다녀야 했다. 그 유복자는

“월사금만 대주세요.”

돈 나올 데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미망인이 된 어머니를 졸랐으나, 자식의 목에 풀칠하게 해주는 것도 벅찬 어머니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게를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애비 없는 호래자식”

6,25 사변 후에 유행했던 욕을 먹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행동을 삼가고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배들에게 봉변을 당해도 참고 견뎠다. 시비가 붙어 지서나 파출소에 끌려가도 도와줄 형제나 친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정말로 분하고 억울할 때는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꺼내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면 명계의 아버지가 도와 주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진짜로 명계의 아버지가 돌봐주신 것일까. 불량배들한테 뺨을 맞아도 참고 일을 할 수 있어, 주위 사람들에게 신뢰받을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해해 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단란한 가정까지 꾸릴 수 있었다.

커가는 아이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에 자그만 장사를 시작했더니 문전성시였다. 아이들을 돌볼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통을 멋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돌볼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이 때문에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데.”

돈보다는 자식이 귀하다는 생각이 들어, 장사를 접고, 월급을 받는 직장에 들어갔다. 다행히 애들은 어려운 일 없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취직하더니 용돈까지 주어, 주위 사람들은, 효자를 두었다며 부러워한다. 그것뿐인가

“당신은 유가족에 해당합니다.”

애들도 크고 생활도 안정되어 나라의 도움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60대 후반의 어는 날,
 
“동작동에 안장된 분이 당신의 부친이라는 것을 나라가 인정합니다.”

유가족을 인정받았다. 국가한테 버림받았으나 원망하지 않고, 성실히 노력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룬 유복자를 하늘이 알아본 것이다. 그처럼 하늘이 알아보는 유복자야 말로

구국충신의 후손이오,
명계의 아버지를 안심시켜드린 효자요,
화목한 가정을 이룬 가장이오,
자식들을 사랑한 아버지가 아닌가.

이런 유복자야 말로 정려문을 세우고 칭송해서 마땅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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