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성(城)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우리나라의 역사와 가장 밀접한 일본인을 꼽으라면 열애 아홉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하급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 시대를 풍미한 무사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었다. 추운 겨울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있는 충성스러움이 오다 노부나가의 눈에 들었기에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정권을 잡고 이듬해인 1583년 11월 오사카로 본거지를 이전하였는데 이때부터 오사카의 찬란한 역사는 시작되었다.

먼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지(陣地)구축의 일환으로 오사카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두해에 걸쳐 대규모 공사를 마무리하면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졸개들이 1592년 4월 12일 조선을 침략하여 7년여 동안 조선 팔도를 미친 듯이 짓밟고 다녔다.

이때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과 의병들의 결사항전으로 왜놈들이 1598년에 퇴각하였는데 그놈은 천벌이라도 받은 것 마냥 그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처럼 아픈 역사를 만든 장본인이기에 우리 국민들은 그놈을 결코 잊을 수 없었나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뒤를 이은 아들 히데요리(豊臣秀賴)가 진을 치고 있던 오사카 성(大阪城)을 적대 관계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14년에 그 성을 몇 차례 공격했지만 그때마다 결과는 패배의 연속이었다. 다름 아닌 그곳은 바다와 강으로 둘러싸인 데다 두 겹의 깊은 해자(수로)를 이용한 지형지물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성을 점령하기 위한 계략으로 특사를 보내서 “이제 전쟁을 그만하고 평화롭게 지내자.”고 종전(終戰) 제안을 했다. 끊임없는 전투에 역시 신물이 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를 반갑게 받아들였고,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서로 정전(停戰)을 하고 평화협정을 했으니까 해자(수로)를 메워서 백성들에게 전쟁이 없는 평화시대가 도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병력들이 나서서 밤을 새워가면서 해자(수로)를 메우는 작업을 하였다. 작업이 끝나고 얼마 후에는 단숨에 오사카 성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말았다.
그들의 속임수를 철썩 같이 믿고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뒤늦게 알고 후회 했지만 이미 오사카 성은 피 범벅이 된 상태였다. 결국 그는 모친과 함께 자살했고 그 성안에 있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도요토미 가문의 멸문지환(滅門之患)으로 인한 화친조약을 어겼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세상에 적장의 말을 대책 없이 그대로 믿는 바보가 어디 있느냐? 적장의 말을 대책 없이 믿는 바보는 죽거나 멸문되어도 마땅하다.”고 조롱하였던 것이다.

그런 역사를 들여다보면 참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 왔고 6.25 동족상잔을 겪은 우리의 입장으로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에서 우리는 북한 놈들에게 이용만 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우린 늘 그놈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여 우리들의 피해만 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며칠 전 국방부가 연말에 발간하는 국방백서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문구를 삭제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한 간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로 한 합의안 4.27 판문점 선언에 따라 적대행위 해소 조치를 북측과 합의하는 상황에서 북한정권과 군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모순인 만큼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국방부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북한=적’ 표현 삭제는 진작부터 예고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시절 자신의 안보관을 둘러싼 논란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TV토론에서도 “그건 국방부가 할 일이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제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가 알아서 대통령의 대북인식에 따르는 조치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국방백서에 북한을 적으로 처음 규정한 것은 1995년이다.

1994년 남북 판문점 접촉에서 북측 대표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자 국방백서에 북한은 주적(主敵)’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고 2000년까지 유지 됐다.

그러나 남북정상 회담을 계기로 주적표현이 쟁점화하자 국방백서 대신 주적개념이 빠진 ‘국방정책’ 책자가 나왔고.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다시 발간된 국방백서에선 주적 표현이 사라지고 ‘현존하는 위협’ ‘직접적 군사위협’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이후 지금과 같은 표현이 다시 등장했다. 이번에 그 표현이 빠진다면 또다시 거센 논란이 불가피하다. 지금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한 이후에도 핵무기 생산 중단 징후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북한=적’ 표현이 삭제될 경우 장병들의 대적관(對敵觀)에 기초한 군의 안보의식이 약화 될 수 있고 북한에도 잘못된 신호를 줄 수도 있다.

따라서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와 군사적 신뢰 조성이 이루어진 뒤에 추진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성급한 결정의 선례가 다시 추가되면 앞으로도 남북관계의 변화나 정권의 성향에 따라 넣었다 빠졌다 반복될 수밖에 없고 그때마다 논란이 재연될게 뻔하다.

국방부가 추진하는 비무장지대(DMZ)내 감시초소(GP)의 시범 철수도 마찬가지 일 것 같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남북이 서로 가까운 GP 10여개 내외를 철수하겠다.”고 밝혔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특히 북한은 160개와 한국은 80개가량의 GP를 운용 중이어서 남북이 같은 숫자의 GP를 줄일 경우 우리의 경계태세만 약화 된다는 말이 아닌가!

동수가 아닌 비례원칙에 따라야 하고 이 역시 북한의 실질적 변화이후 추진해야 할 것 같은데 참새들만의 생각일까!

요즘 들어 부쩍 정상회담 타령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하늘이 허락하지 않는 한 쉽지는 않을 듯한데 말이다. 그렇다! 우린 늘 그놈들한테 얻어터지기만 했기 때문에 분해서 하는 말이다! 혹자는 말한다.

“적화통일 되면 춤추고 다닐 놈 많다고 한다.” 그만큼 이 나라에는 얼빠진 놈들이 많다는 뜻인가! 아무튼 아리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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