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버들잎을 띄우는 여신’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세종시 아름동의 ‘두루근린공원’에는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글씨를 모시는 어서각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성계와 관련된 유래이기 때문인지 ‘역사공원’이라고도 한다.

이성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필적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범지기마을 7,8단지 사이의 층계를 올라 숲길을 천여 보 걸으면, 단청이 청결한 정자가 삭막할 수도 있는 아파트 단지에 역사의 여유를 제공한다. 계룡산에 도읍하려 했던 인연에 근거하는 유적인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우물가에서 맺어진 사랑이 깃듯 정자였다.

고려의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에 나섰을 때의 일이다.
사냥에는 이골이 났으므로 호랑이 한두 마리를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은 말이 헐떡일 정도로 찾아다녔으나 한 마리의 호랑이도 보지 못했다. 그런 날일수록 더 피곤한 법. 이성계는 타는 듯 한 갈증을 풀 생각으로 마을에 내려갔는데, 한 낭자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낭자, 물 한 바가지 주시구려.”

이성계가 물을 청하며 손을 내밀자, 낭자가 놀라 한 발자국 옆으로 물러서며 힐끗하는 듯하더니, 물을 뜬 바가지를 바로 건네지 않고, 버들잎을 따서 거기에 띄운다.

“낭자, 그게 무슨 짓이오.”

이성계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갈증이 심하신 것 같은데, 급히 마시면 사레들 수 있사옵니다. 그러니 후후 부시며 천천히 드시지요.”  

갈증이 심한 것 같아 버들잎을 띄운 것이라고 설명한 다음에 물바가지를 건네는데, 갸름한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 수정 같은 눈동자, 오뚝한 코, 앵두 같은 입술이 가지런했다.

“낭자의 뜻을 모르고 결례했소이다.”

이성계는 즉시 잘못을 사과하고 낭자의 말대로, 물바가지 위의 버들잎을 후후 불며, 바가지 너머로 낭자의 모습을 응시하는 것이, 낭자의 모습을 눈에 담아가려는 것 같았다.

물을 다 마신 이성계는 마침 날도 저물어, 낭자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고, 낭자의 부모들도 이성계의 풍모가 마음에 든다며 허락했다.

우물가에서 만난 총각과 처녀가 사랑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달콤한 일로, 누구나 해보고 싶은 일인데, 그와 똑같은 이야기가 고려를 건국한 왕건에게도 있다.

궁예의 부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후백제의 견훤과 패권을 다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둘이 밀고 밀리는 전쟁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왕건은 나주 땅을 점령하고, 그곳을 시찰하는 일이 있었다.

민심을 살피는 데는 우물가 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며, 각 마을의 우물을 찾아 돌며 물을 얻어 마시는데, 어느 마을의 우물가 이르러

“물 한 모금 얻어 마십시다.”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물을 청했다. 그런데 물을 긷던 낭자가 다른 마을의 여인들과 달리, 물바가지를 바로 건네는 것이 아니라, 우물가에 늘어진 버들가지의 잎을 따더니, 그것을 바가지 위에 띄우는 것 아닌가.

“아니 이게 무슨 심술이오.”

왕건이 화를 내며 낭자를 노려보는데, 낭자가 살짝 웃으며

“갈증이 심하신 것 같아, 후후 부시면서 드시라고 띄웠습니다.”

버들잎을 물바가지 위에 띄운 이유를 설명했다.

“그런 뜻이 있었소이까. 그걸 몰랐소이다. 그런데 낭자는 뉘시오.”

왕건은 예사로운 낭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이름을 물었다.

“소녀는 나주 땅의 오류화라 하옵니다.”

낭자도 스스럼없이 이름을 밝혔고, 왕건은 낭자의 말대로 후후 불며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낭자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바로 낭자의 부모를 찾아가 청혼하였다.

이성계의 혼인담과 같은데, 왕건이 458년이나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왕건의 혼인담을 이성계가 빌린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혼인담은 아주 많다.

옛날에 하늘을 다스리는 옥황상제가 천하의 통치자로 생각하는 왕자를 불러,
 
“너는 천하를 다스려야 하니, 천하의 여신과 혼인해야 한다.”

천하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일러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왕자가 구름 위를 선회하며 천하를 살피던 끝에, 두루봉 자락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신을 보자, 곧장 하강하더니

“낭자 물 한 모금주시구려.”

물을 청했다. 바가지로 물을 뜨던 여신이 고개를 돌려 왕자를 바라보는데, 눈썹과 눈이 기다랗고 콧날이 우뚝한데, 양볼은 백옥처럼 하앴다.

“내가 찾던 낭자다.”

왕자가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낭자는 물바가지를 바로 건네지 않고, 계수나무의 잎을 서너 개 띄운 다음에, 왼쪽으로 한 바퀴 돌린 다음에 건넨다. 그것은 두 손으로 받은 왕자가

“낭자의 이름을 무어라 하오.”

화를 내거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낭자의 이름을 물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이름을 묻는 것은 혼인을 청하는 일이고, 그것에 답하는 것은 혼인을 허락하는 일이었다.

“저는 두루봉 자락의 범순이라 하옵니다.”

낭자가 웃으며 이름을 댔고, 왕자는 물바가지의 잎을 후후거리며 빙그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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