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殉敎者)’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순교(殉敎)는 자기가 믿는 종교 즉,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아 목숨까지 잃게 되는 것을 말하며 순교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한다.

순교는 주로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유일신교(唯一神敎)에서 발생하는데 그중에서도 가톨릭교회는 순교를 경신덕(敬神德)으로 여기며 특별히 중요시 하고 있다.
 
순교의 수단으로는 각종 고문, 투옥, 유형(流刑), 참수(斬首), 화형, 돌로 쳐 죽이기, 맹수를 이용한 처형 등 여러가지가 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본다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한 성(聖) 스데반이 첫 순교자로 일컬어지는데 초대 교회 때부터 순교자는 전례(典禮)나 성유물(聖遺物)을 통해서 숭경(崇敬)을 받아왔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迫害)시대 때에는 사도 바울로와 베드로를 비롯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영국과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는 혁명기 때에 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으며 더 가까이 19~20세기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 및 멕시코에서 순교자의 피가 넘쳐 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세계 각 도처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긴 했어도 우리나라에 비하면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고대 사회에서는 통계자료를 별로 중요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순교자 숫자가 천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세비우스가 예시(例示)하듯이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고문과 처형을 받아드리기는 했으나 실제로 많은 이들이 박해와 고문에 직면해서는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한반도에서도 고대시대의 순교자를 찾는다면 삼국시대의 승려 이차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신라 527년(법흥왕14)에 불교의 봉행(奉行)을 주장하다가 처형되었다. 그의 순교는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삼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근세에서 근대시대로 이어지면서 조선은 서구의 열강들과 국교 수립을 하게 된다.

이 당시 가톨릭교도로서 1785년(정조9)에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예배를 드리다 발각된 김범우가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듬해 죽음으로써 사실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6년이 지나 충남 금산의 권상현과 윤지충이 가톨릭을 신봉하여 조상의 제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1)의 신유박해(辛酉迫害)때는 1년 사이에 이승훈 등 약 300명의 교도가 순교하였는데 이때 청나라 신부인 주문모(周文謨)가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순교하였다.

이어 38년이 지난 기해박해(己亥迫害)때에도 70여명의 교도가 순교하였고, 1846년(헌종12)에는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이 새남터에서 망나니의 칼춤에 ~삭둑~ 참수 당하였는데 그의 나이 25살 이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집정한 후 1866년(고종3)부터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가톨릭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가 시작되는 병인사옥(丙寅邪獄)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선교사 9명과 남종삼 등 한국인 8,000여 명이 순교당하였다.

그 결과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유발하는 계기가 되어 절두산 성지와 얼마 후 양화진 묘원이 우뚝 서게 되었다. 이는 세계 종교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인데 어떤 학자는 이를 로마제국의 탄압과 에스파냐의 종교재판에 비교하기도 하였다.

이 수난은 일제 강점기에도 계속되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는 일본 놈들의 신사참배(神社參拜)에 항거하다가 순교하였으며, 동족상잔 6.25 중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참살되어 순교하였다.

또한 이 지역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순교한 김동훈 전도사의 이야기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김 전도사는 1897년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8세에 혼례를 치렀으나 닷새 후 신부가 유행병으로 죽음을 당하는 인생의 질곡(桎梏)을 겪은 후에 1920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복음 전도사로서 수양을 쌓게 된다.

1923년 5월 신학교를 졸업한 뒤 경주교회와 교단순회 전도대에서 사역하다가, 1928년 3월 조치원 성결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이 교회의 2대 담임 목사였던 김 전도사는 애굽 사람인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치고 감옥에 갇힌 요셉과 같은 인물이었다.

부임한 그해 9월 29일 저녁 한 여인의 유혹을 받았지만 단호히 뿌리쳤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이 여인은 자기의 남편에게 김 전도사가 성폭행을 하려고 해 도망쳤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남편은 조치원에서 알아주는 깡패였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김 전도사를 찾아가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김 전도사를 사모님이 발견해 동네 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받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았다.

부득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겼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김 전도사는 그해 10월 16일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만다.

당시 김 전도사의 지인들은 그 깡패를 고발해야 한다고 했으나 김 전도사는 이미 용서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 전도사의 순절과 용서가 알려지자 이에 감동한 가해자인 깡패와 가족들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믿지 않던 세상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흠모(欽慕)하며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치원 지역의 기독교계는 교단을 초월하여 김 전도사의 순교를 추모(追慕)하며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기독교 대한성결교회의 핵심가치인 성결을 몸과 생명으로 지켜낸 김동훈 전도사.

그는 처음에 순절자로 불렸으나 이후 남다른 순교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1년 교단 총회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유업을 길이 이어가기 위해서 어느 여름 날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조치원교회 본당 앞에서 최명덕 담임목사의 인도에 따라 흉상(胸像) 제막식과 함께 미션센터에 있는 200석 규모의 다목적실을 ‘김동훈 홀’로 하는 명명식(命名式)을 갖기도 하였다.

오늘따라 과거에 인색하지 않은 님들의 리더십(leadership)이 빛나 보인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