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을 뺀 명태를 완전히 말리지 않고 반 건조한 상태로 한 거예요.”
“코다리 찜으로 많이들 먹제.”
“봉준아, 코다리는 방언으로 아직 국어사전엔 없어.”
“뭐꼬?”

“‘노가리를 풀다’나 ‘노가리를 깐다’처럼 많이 쓰는, 거짓을 속되게 이르는 말인 노가리는 명태의 새끼를 일컫는 말이야.”
“우야꼬, 예서도 글얘기할끼가.”
“맞아요. 생태, 동태, 황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로 명태는 잡힌 상태와 시기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대요.”

“그래요. 얼리지 않은 것은 생태, 얼린 것은 동태, 말린 것은 북어라하죠.”
“기래. 한겨울 추운 곳에서,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말려 살이 연하고 노랗게 된 것이 황태고마.”

“그만 됐다. 건배 한잔!”
“신혼 재미란 다 이런 것 아이겠노.”
“부럽다. 하! 하! 하!”

“하늘에 계신 누군가의 흰 머리카락처럼 치렁치렁 물이 풀어져 내려오는 날. 길을 잃고 논에 들어온 미꾸라지를 잡아 추어탕을 먹기도 했제.”

“미꾸라지라고?”

“호박잎 넣고 끓인 고기국은 물푸레보다도 더 푸른 국물이었제. 세상의 고요가 한층 납작하게 드리워지면 피감자를 삶기도 했제. 우산을 어깨에 걸친 채 펌프를 자아 올린 물로 감자를 씻던 엄메의 뒷모습이 삼삼하고마.”

“어린 시절 이야기라…”
“기때의 기 별미를 이젠 고향에 가도 찾을 수가 없제. 기런 그리움이 혀끝에 고이고마.”
“나 역시 먹을거리에 대한 집착이 있어.”

내 아버지는 공초(空超) 오상순 시인을 핑계 삼아 평생 하루 세 갑 담배를 피웠다. 늘 나와 싸웠지만 같은 말로 대응했다. 공초 선생은 폐암으로 죽어가면서도 담배를 즐기며 죽음에 의연했다는 것이다. 시시한 삶을 초월한 ‘죽음에 의연’, 이 표현을 특히 강조했다. 나는 담배를 하나 피워 물었다.

“내를 포함해 과자, 술, 담배처럼 건강에 좋지 않은 기호식품을 즐기는 사람을 중독자라 하제.”
“얼마나 사는 인생이라고, 이 맛있는 것을 참아서까지…”
“내도 비슷한 논리로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없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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