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宣敎) 비사(秘史)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 부의장.

어느 선교사(宣敎師)의 이야기가 있다.

지금부터 112년 전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미국의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는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충남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하였다. 공주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 이름으로 ‘우광복’ 이라고 지었고,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더 낳았다.

선교사는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진눈개비를 피해 상여간(喪輿間)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고 난, 그 장례용품을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일로 선교사 부인은 홀몸이 되었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선교사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공주에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였고, 그 후 47년간 선교사역을 했다.

그러던 중에 두 딸은 풍토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11살에 죽어서 공주 땅 영명동산에 묻히게 되었다.

우광복은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가 바로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信託統治)를 하던 때였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선교사의 아들 우광복이 하지 장군의 참모가 되었고, 한국 정부수립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때 하지 장군이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48명이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정부 수립될 때 각 부처마다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임명되어 우리나라에 미신(迷信) 타파가 시작되었고, 국방부 장관도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軍牧)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군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제헌국회 국회의원 거의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도 안 되는 때였다. 그런데 사모가 추천해 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20년 만에 500만이 되고, 30년 만에 약1000만의 성도가 되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던 것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고, 두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선교사 때문이라 할 것이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공주 영명동산에 나를 묻어달라”고 유언한다.

올리브가 풍토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괴로워하는 모습에 몇 밤을 지새우며 “불쌍한 내 동생을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흐느낌은 영명의 산천을 울리고도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오빠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렇게 죽은 동생이 늘 가슴속에 살아 있었나 보다. 그래서일까! 우광복의 묘는 지금도 동생 옆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이 나라에는 1884년부터 서구의 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놓칠세라 수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서 제물포에 발을 내딛기 시작하였다.

알렌(Allen)선교사가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살려낸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과의 관계가 이어 지면서 처음으로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알렌의 뒤를 이은 헤론(heron)이 전염병의 환자를 돌보던 중 전염되어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었는데 시신을 어디에 매장해야 할지를 몰라, 다급한 문제만 대두되다가 결국 양화진으로 정해지면서 1890년 7월 28일에 묘지공원으로 허가되었다.

이곳에는 한국의 초대 선교사들과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들의 무덤이 약 555기가 있다. 이들 중에는 선교사들과 함께 순직한 가족들과 청춘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질병으로 묻힌 아이들이 많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그들의 가족들을 잃어가면서까지 이 땅에 헌신했던 외국 선교사들의 고귀한 삶이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듯하여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아펜젤러 선교사의 비문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왔습니다.” 라는 문구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감동케 하고 있다.

영적으로 척박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양화진의 선교사들.

그들의 수고와 순교는 결코 헛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잘 이어지면서 한국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그들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길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관심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신록의 계절을 맞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의 묘원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

모처럼 영웅의 모습들을 본 것 같은 좋은 날이었다. 임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드리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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