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고,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없다고 외칠 용기가 없는가.

학교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 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교조는 합법화에만 1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제.”
“보수 세력의 견제로 툭하면 정치적 이슈에 휘말렸어.”
“기래서 원했던 교육의 본질적인 면에 주력할 여유가 없었제.”

한국에서 교육개혁을 꿈꿨던 교원들의 시도는 싹을 틔우기도 전 색깔론 딱지가 붙으며 처참히 좌절됐다. 1960년 학교 민주화를 표방하며 4.19 교원 노조가 출범했지만 용공이라는 색깔론이 씌워진 채 불과 1년여 만에 조직은 와해됐다.

이후 1980년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출범할 때까지 평교사가 주축이 된 자생적인 교원단체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교원단체의 지위를 누린 곳은 한국교원단체연합회(교총)다. 그러나 교총의 성격은 일교조나 전교조와는 완전히 다르다.

교총의 전신은 1947년 11월 당시 문교부장관이던 오천석이 중심이 되어 만든 조선교육연합회로 교원들의 단체라기보다 반관, 반민의 성격이 강했다. 단체운영비의 상당 부분이 문교부의 지원금과 방학책 독점 판매에서 나왔다.

조선교육연합회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름을 대한교육연합회(대한교련)로 바꿨다.

“대한교련은 일반 교사가 아니라 교장 등 관리자를 중심으로 운영됐제.”
“그러다 보니 교육개혁보다는 정부의 교육정책을 홍보하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에 지지를 표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 강조됐어.”
“정부의 어용단체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제.”
“대표적인 것이 유신 선포와 군부 정권지지 결의문 채택이었어.”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확산되고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대한교련은 위기를 맞고마.”

교원이 되면 자동적으로 대한교련 회원이 되어 회비를 공제하는 시스템에 대한 항의와 교련 탈퇴운동이 이어진 것이다.

이후 대한교련은 이름을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로 바꾸고, 평교사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제도 개선을 추진하며 변화를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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