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당산에서 들은 이야기’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당산에 솟은 상수리나무에 둥지를 튼 까마귀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침략으로 부국을 이루겠다는 일본제국이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더니, 나중에는 소녀들을 끌어다, 전쟁을 하다 살인마가 된 일본병사를 위로하는 성노예로 삼으려 했다.

그것을 안 부모들은 어린 딸들을 서둘러 혼인시켰다.

그래야 성노예로 끌려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금순이도 같은 마을의 총각과 혼인하여 성노예로 끌려가는 화를 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6,25가 터져, 입대한 신랑이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복자를 낳아서 기르게 되었다.

당시는 여자가 글을 못 배우는 세상이었고, 일찍이 혼인하여 유복자를 둔 어머니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남편의 전사통지서를 받고도 내용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이장이 읽어준 뒤에야 울기 시작해야 했다.

유복자를 업고 남의 집 일을 도우며 먹고 살아야 했으나, 전쟁 뒤라 풍족한 곳은 어디에도 없어, 유가족이라고 면사무소가 가끔씩 주는 배급은 큰 도움이었다.

다행히 유복자 창기도 ‘애비 없는 놈’이라는 말이 듣기 싫다며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지 않았고 공부도 꽤 잘했다. 유가족이기 때문에 월사금이 면제되어 어렵지만 공부를 즐겼다.

“이대로 라면 고등학교까지 가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겠다.”

빨리 자라서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1961년에 쿠데타로 들어선 정부가 유가족을 재정리한다더니, 창기는 유가족이 아니라는 연락을 주었다. 아버지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영면하고 계시는데도, 호적의 이름이 다르기 때문에 유가족이 아니란다.

당시에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자가 흔했고, 한자로 이름을 쓰지 못해도 큰 흉이 아니었다. 국민 80퍼센트 이상이 문맹이었던 시대였다. 그런데도 호적과 다른 이름을 썼기 때문에 유가족이 아니라며 그때까지 조금씩 주던 배급을 끊었다.

국가가 전사자의 가족을 버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말해도 면사무소는 막무가내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온갖 나랏일을 주도하며 군인들의 복지를 향상시켰으며, 유가족의 복지 증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생활은 물론 교육에도 불편이 없을 정도로 배려했다. 취직할 때도 유리한 입장에 서게 해주었다. 월남전에 참여한 가족에도 지나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배려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전사로 유복자로 태어난 창기는 학비가 드는 중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학비만 대주면 어떻게든 공부를 하겠다.”

라는 생각을 했으나 방법이 없어, 가방 대신에 지게를 지고 일을 다니거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했다. 그러다 주경야독을 꿈꾸고 상경했으나, 일자리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설사 취직을 한다해도 돈을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도둑의 누명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1960·1970년대의 서울역에는 잘 곳이 없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광장이나 염천교 근처에서 노숙하다 일자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벌떼처럼 몰려가던 시대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일자리가 없어 염천교 밑에서 지내다, 특별단속 기간에 파출소로 끌려갔는데, 순경들은 끌어간 노숙자들을 불손하다고 때리고, 말투가 맘에 안 든다며 걷어차다, 반항하면 영창에 집어넣는 등 기세등등했다.

몸을 수색하던 순경이 창기의 안주머니에서 서류뭉치를 발견하자, 불온문서라도 찾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금세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불온문서가 아니라, 창기가 한시도 몸에서 때어놓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의 전사통지서와 아버지를 모시는 지방의 내용을 적은 것들이었다.

순경은 그것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표정을 바꾸며

“생활이 어려울 텐데 지방까지 품고 다니다니 참으로 기특하다. 어려움을 견디며 노력하면      크게 성공할 것이다.”

좀 전과 달리 격려하며 풀어주었다. 공무원이 고맙다는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순경의 격려가 있어서 그랬는지, 창기는 곧 공장에 취직하고, 성실히 노력하여, 마음이 맞는 짝을 만나 결혼하고, 똑똑한 자식들까지 두었다. 유가족의 혜택을 받지 못하여 공부는 못했으나, 열심히 일하며 자식들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가정을 꾸린 것이다.

그러다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되자, 행정착오로 제도권에서 탈락된 유가족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을 들은 창기는 아버지가 계시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비롯하여 대전의 현충원, 영령부대 등을 찾아다니며 미비한 점을 보충하여, 드디어 유가족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미 생활이 안정되어 유가족에게 부여되는 혜택을 받지 않고도 가족을 이끌어 갈 수 있었지만, 저 세상에서 걱정하실 것 같은 아버지가 마음을 놓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자 관계를 인정받은 것 같아서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가 목 놓아 울었다.

염천교 밑에서 잠자다 끌려갔을 때, 순경이 “기특한 소년”이라며 풀어주었을 때보다 더 시원해지는 가슴으로 울어댔다.

처음으로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고, 순국한 아버지에 대한 긍지가 솟아나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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