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당산과 미호천’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진국의 땅이었던 연기군의 당산은, 마한시대를 거쳐 백제의 땅이 되었는데,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서로 고유의 전통을 자랑하다, 결국에는 보다 편리한 문화와 문명으로 편한 생활을 하려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개발하고 발전시킨 문화를 이웃 진한과 변한에 전해주는 종주국의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후에, 위례성을 도읍지로 해서 건국했던 백제가, 공주와 부여로 도읍을 옮기는 것을 보아도, 이곳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훌륭한 문화를 창조하여 이웃나라에 전해주었던 백제가, 게으른 왕과 신하들 때문에 영토를 넓히려는 신라의 말발굽에 짓밟히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신라가 불러들인 중국병사들이 휘두른 창칼에 망하고 만다.

그런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당산이 들판에 우뚝 솟아있다.

산이 높아서 우뚝한 것 아니라 들판이 넓기 때문에, 157미터의 봉우리인데도 높아 보이는 것이다. 당산을 토성으로 둘러싼 것은 주민들이 원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

너른 평야에 사는 주민들은 먹고 사는 일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 나누어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을 필요가 없었고 남의 것을 탐하여 멀리 나갈 일도 없고, 성을 쌓을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탐욕에 사로잡힌 이웃 군장들은 주민들의 행복이나 세상의 평화가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선량한 주민들에게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쥐어주며 전장으로 몰아낸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백제와 고구려 신라로 발전된 삼국은 서로 욕하며 싸웠다. 그런 과정에서 당산자락의 풍요로운 자원을 탐하는 자들의 약탈이 이루어졌고, 그것을 방어하는 당산성이 세워진 것이다.

약탈과 살생이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을 원인으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산물이 풍부하고 성품이 온화한 이곳 주민들이 먼저 분쟁을 일으키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렵다.

원래 당산 자락에는 신과 인간들이 어울리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산에는 산을 다스리는 신이 있었고, 강에는 강을 다스리는 신, 그리고 들에는 들을 다스리는 신이 살며

어떻게 하면 산속의 초목과 짐승이 어울리며 평화로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들에 사는 사람과 초목이 풍성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물에 사는 고기가 수초 사이를 힘차게 헤엄칠 수 있을까.

모두가 같이 어울려 사는 방법을 상의하며 살았다. 그래서

산에는 털이 거친 짐승 털이 부드러운 짐승이 자라고
강에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 없는 물고기가 같이 놀고
들에는 오곡백화가 아름답게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다.

당산을 다스리는 신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첫째 아들에게 비구름을 불러오게 하고, 장마가 들면 둘째아들을 해님에게 보내 햇살이 비쳐달라는 뜻을 전하게 하고, 무더위가 계속되면 셋째에게 살랑바람을 불러오게 했다.

그때, 미호천의 수신은 왕자 둘과 공주 하나를 두고 있었는데, 공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주가 나타나면 흐르던 강물이 멈출 정도였다.

수신은 남들이 보는 것도 아깝다며 물밑 깊은 곳에 궁을 짓고 그곳에 살게 했다. 그런 수신의 사랑으로 공주는 부족할 것 하나 없이 자랐으나, 커가면서 궁 밖의 세상이 궁금해져, 하루는, 문안하러 찾아오는 메기에게

“물 위에는 땅이 있고, 땅 위에는 하늘이 있다는데, 한 번 보고 싶구나.”

라는 말을 하고, 메기를 앞세우고 헤엄치며 노는데, 물에 비치는 하늘의 구름도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부족한 것 없이 원하는 것 모두가 이루어지는 궁에서 노는 것보다 훨씬 재미났다.

물 위에 떠다니는 그림자를 잡겠다며 텀벙댔으나,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만다. 공주는 그것이 신기하다며 다른 그림자를 잡겠다고 돌아다니느라 정신없었다. 그런 놀이에 지친 공주가 물가에 올라 바라보니, 너른 들판에 초목이 자라는데, 그 풍광 역시 신기하기 그지 없었다. 넋을 잃은 공주가 사방을 둘러보는데,

“낭자는 어디 사는 뉘신지요?”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까지 본 일이 없는 잘생긴 남신 하나가 서있지 않은가. 아버지나 오빠들보다 훨씬 더 잘생긴 남신이 웃으며 바라보는데,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지고 그랬다.

그것은 말을 건 남신도 마찬가지였는지, 붉어진 얼굴로

“이렇게 아름다운 낭자는 본 일이 없습니다. 나는 당산신의 셋째 왕자 연장이라 하오.”

신분을 밝히며 낭자에게 다가선다. 신들의 세계에서 이름을 대는 것은 혼인을 맺고 싶다고 청혼하는 일이고, 그 질문에 답하여 이름을 밝히는 것은, 청혼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연창이라는 이름을 들은 공주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왼손으로 가볍게 누르며

“수신의 딸 전희라고 합니다.”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연창이 내민 손을 잡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산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그날 이후로 둘은 매일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헤어지더니, 석 달 열흘이 지나자, 당산 자락의 우물가에 지붕이 높은 집을 짓고 같이 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산자락의 신과 인간이 화합하고, 인간들이 신뢰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저작권자 © 세종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