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당산성’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세종시가 조성되기 전에는, 연기군 남면 복통리라고 불리던 곳에, 당산이라는 산이 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했던 이 지역은 두잉지현 일모산군으로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전의와 더불어 전기현으로 불렸다. 

157m가 안 되는 당산은, 주봉과 주봉에서 완만하게 200m쯤 뻗어 내리던 능선이 솟아 오른 북봉으로 구성되는데, 사람들은 두 봉우리가 표주박처럼 보인다는 말을 한다.

당산을 바라보던 길손 하나가 군함 같다며 무릎을 치는데, 너른 평야에 낮게 누운 형상의 비유로는 적절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평야를 바다로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산을 높이 3m 길이 540m의 토성이 둘러싸고 있었다는데 흔적은 확인하기 어렵다.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성이 평화스러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평화보다는 약탈과 살생을 동반하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것이 성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평화를 시샘하는 세력이 난입하여 자행하는 방화와 살생에 대비하고 요격할 목적으로 마을 입구나 침략자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울타리나 성을 세우는 것이다. 그런 성이 한가롭기 그지없는 당산에 있었다니, 어찌 이상하지 않겠는가?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약탈자가 몰려오거나 침략군이 쳐들어오면 대문을 닫거나 광에 열쇠를 거는 것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을 사람들이 일치단결하여 울타리를 만들거나 담을 쌓고 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일시적인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요새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당산이 요새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경우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일단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침략자들의 위해로부터 피신시킨 다음에, 요새로서의 성이나 담장 뒤에서 요격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당산에 성이 있었다는 것은 당산 자락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려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누구였을까.

인간이나 신들은

“협조하고 화목해야 한다.”

는 말을 잘 한다. 그러면서도 남의 것을 탐하거나 인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려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상대의 조그마한 약점이라도 찾으면 바로 침탈하려 한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태백산으로 강림했을 때, 그곳에 신이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그 일행을 환영했을까? 아니면 저항하며 물리치려 했을까?

그것은 환웅의 태도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환웅이 원주민과 화합하려고 노력했으면 환영받았을 수도 있으나, 침략자의 태도를 취했다면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은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와 유화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해모수가 유화와 사귀려하자, 유화의 아버지 하백은 그것을 반대하며 꾸짖었다.

그리고 주술경쟁을 벌렸는데, 하백이 잉어·꿩·사슴으로 변해보이면 해모수는 그것보다 강한 수달·매·승냥이로 변하여 공격하여 혼인을 허락 받았다.

말하자면 주술경쟁에서 해모수가 하백보다 우수한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에 하백은 어쩔 수 없어 딸과의 교제를 허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산자락에서는 언제부터 분쟁이나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그것을 아는 것이 당산성의 의미를 아는 일이 될 것이다.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5천 년 전에 평양에 조선을 건국하고 1500년을 다스렸으나 중국에서 들어온 기자와 위만이 대신 다스리게 되는데, 그렇게 왕조가 바뀔 때마다 많은 주민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조선을 떠난 유민들은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서해안을 따라 유랑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눌러앉기도 하고 

“이왕에 길을 나섰으니 더 찾아보겠다.”

계속해서 걸음을 재촉하는 무리도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의 터를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긴 세월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들이 살기 좋다며 정착하려는 곳은,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이미 거주하는 토착민들이 있었다.

그래서 유민과 토착민 간에는 빼앗고 지키려는 분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유민이 토착민을 몰아내거나 복속시키는 경우, 유민이 쫓겨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경우, 서로 타협하여 어울려 사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어쨌든 유민들은 나라를 건국하고 통치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 없는 토착민을 개화시켜 진국이라는 나라까지 출현시킨다. 그 진국의 실체가 분명치 않았으나 중부에 있었다는 설,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중국과도 직접 교류했었다.

단군조선을 제외하면 중국의 기록에 등장하는 나라는 진국이 처음인데, 진국은 후에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거쳐, 백제 신라로 발전하여 삼국을 정립시킨다.
그러는 과정에서 좋은 곳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다툼과 전쟁이 되풀이되었다. 당산에서의 분쟁이나 전쟁도 그런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시대에는 먼저 보고 차지하는 자가 임자였다. 그래서 강자가 약자의 땅을 빼앗거나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약탈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다. 그런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방화와 살생은 죄가 아니라 용맹이라고 칭송 받았다. 그런 약육강식의 시대에

“우리의 안전과 행복은 우리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

당산 자락 주민들의 절실한 자구책에서 쌓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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