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호수공원의 구슬’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2009년에 설계를 시작하여, 2013년 6월에 개방된 호수공원을 걷다보면, 인공호수가 아니라 태곳적부터 존재했던 자연호수로 여겨진다.

지금은 먼 옛날로 생각할 수도 있는 1960년대의 이곳은, 봄에 뿌린 씨앗을 가을이면 추수하던 들판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학생들이 메뚜기를 잡으러 뛰어다니기도 하고, 논두렁 아래로 흐르는 도랑에서 게도 잡고 새우도 뜨던 그런 곳이었다.

5학년인 임종서는 그런 일보다 습지의 금개구리를 관철하며 땅에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종서가 그린 금개구리는 금방이라도 습지로 뛰어들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서만 보면  금개구리만이 아니라 소나 고양이도 그려보라고 요구했다. 종서는 그것이 재미있는지,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척척 땅에다 그려댄다. 그러면 사람들은 

“솔거가 다시 태어난 것 같다. 혹시 임씨가 아니라 솔씨 아냐”

신라의 화가 솔거가 재생한 것 같다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던 종서가 요즘은 물방울무늬가 박힌 원피스를 입은 단발소녀만 그리는데, 그러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날도 학교가 파하자 들에 나가 금개구리를 그리고 있는데

“애, 너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구나.”

서울 말씨가 등 뒤에서 들려, 뒤돌아본 종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렇게 예쁠 수 없는 소녀가 그림을 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만 산다는 금개구리가 있다는데, 이것이 그 금개구리니.”

이것저것을 묻는데, 목소리도 고왔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예쁜 목소리라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종서는 소녀가 묻는 말에 대답하며 금개구리가 사는 습지와 들을 안내하면서, 소녀가 옆집에 사는 말끔히 아저씨의 조카, 미희라는 것을 알았다.  

말끔하게 차려입는다 해서 ‘말끔’이라는 아저씨는 입만 열면, 서울에 산다는 조카를 자랑했기 때문에,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 않았다. 게다가 동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기막힌 인연이라는 생각이 들며 가슴까지 뛰었다.

그날 이후로 성수는 단발머리 소녀만 그렸다. 어머니가 달걀을 팔아서 재봉틀 서랍에 숨겨둔 돈으로 산 스케치북에 4비 연필로 소녀만 그렸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그림 솜씨가 더 좋아진 종서는,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들에 나가 스케치북에 소녀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데, 

“너 진짜로 잘 그리는구나. 그런데 내가 이렇게 예쁘니!”

귀에 익은 소리에 뒤돌아보았더니, 이게 웬 일인가! 양 갈래 머리를 한 미희가 그림을 보며 웃고 있지 않는가. 그 얼굴을 본 순간, 세상이 반가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야, 너는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예뻐.”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은 열리지 않고 얼굴만 붉어졌다. 그런 성수를 빤히 바라보던 미희가 곱게 쥔 주먹을 불쑥 내밀며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네 눈동자 같아서 백화점에서 산거야.”

종서를 위해서, 그것도 백화점에서 샀다는 구슬, 다섯 개를 건네주고는 습지 쪽으로 뛰어갔다. 종서는 스케치북을 든 체로 미희를 따라갔다. 미희를 종서를 앞세우고 습지와 논두렁길을 걷다, 다음날 무용대회가 있다며, 아저씨 집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갔다.

성수는 그날부터 미희가 생각날 때마다 구슬을 꺼내보고, 구슬을 보면서 미희를 생각했다. 그러다 시 낭독을 좋아하시는 국어 선생님이   

그리운 임이 준 선물을 고이 묻었더니
곱고 고운님과의 인연이 이루어지네.

시를 읊어 주신 날, 성수는 다섯 개의 구슬을 논두렁에 묻으며 소녀와 짝이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눈이 많이 내린 겨울날, 미희가 탄 버스가 절벽으로 구르고 말았단다.

그 말을 들은 성수는 밤새껏 울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50세가 넘은 성수는 ‘소녀상’을 그리는 유명한 화가가 되어 세계 각국을 순회하느라 바빴다.

그러다 고향이 세종시로 변했다는 말을 듣고, 옛날이 그리워 들을 찾아가 보았더니, 구슬을 묻었던 곳은 호수로 변해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구슬을 묻었던 논두렁을 찾아보았더니, 분수가 솟아오르는 그곳 같았다.

“그래, 분수가 솟아오르는 저곳에, 미희가 준 구슬을 묻었었지.”

어렵게 구슬을 묻었던 곳을 찾아서 바라보는데, 하늘로 솟아올랐다 떨어지는 분수 사이로, 단발머리의 미희가 나타나더니 

“나를 예쁘게 그려주던 종서가 왔네.

웃으며 손을 흔드는데, 더 예뻐진 것 같았다.

■권오엽 명예교수의 상상력이 글속에 들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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