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오산’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전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임난수는 전월산에 올라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능선길의 바위에 앉아 북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라에 대한 충성만을 생각하면 살았던 과거가 생각나기도 하고, 채석강에 나가 청운의 꿈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면서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겠다!”

기개를 다졌던 소년 시절의 일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관리들의 탐욕을 욕하며 죽어가던, 제주도 주민들의 절규처럼 들리면, 온몸의 힘이 쑥 빠진다.
“조금만 백성을 아꼈어도 반란군에 가담하는 일은 없었을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가솔들은 물론 마을 주민들도 소중히 여기고 보살피려 했다. 글을 배우려는 자에게는 글을 일러주고 무술에 뜻을 가진 자에게는 연마하는 방법을 알려주자 주민들은

“여느 양반들과는 다르시다니까. 저런 분이 벼슬을 하셔야 나라가 잘 될텐데.”

장군의 덕을 칭송하고 따랐다. 장군은 그런 주민들과 어울려 사는 게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전월산에 올라 이미 망해 없어진 고려를 생각하며 북방을 바라보다 내려오는데, 장남평야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이는데, 눈에 익었다. 이마에 손을 대고 바라보았더니, 웬걸 그렇게 보고 싶은 붕우 정온이 아닌가!  

“아니 대사헌 나리 아니세요.”
너무 반가워 단숨에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장군이 보고 싶어서 찾아 왔소이다.“
정온도 서둘러 걸어오더니 임난수를 얼싸안았다.   

“이성계가 진양까지 사신을 보내 출사를 명했으나, 눈이 안 보인다며 거절했습니다만, 장군이 보고 싶은 마음은 누를 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소이다.”  

“잘 오셨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찾아가 뵐 생각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둘은 애들처럼 기뻐하며 담소하는데 끝이 없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어진 담소는 다음날 아침에 다시 시작되어, 하루 이틀을 지나 대엿새가 지나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산과 들을 산책하며 담소하더니, 이레째가 되는 날은 가까운 오산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계속한다.

그러다 정오가 지날 무렵에, 주위를 둘러보던 정온이 
“왠지 이곳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눈에 많이 익습니다.”

왠지 전에 와보았거나 놀았던 오산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했다.
“오산의 정기를 받은 후손을 보실 모양입니다.”

정온의 말을 임난수가 새삼 오산을 둘러보면서, 오산의 정기를 받은 후손을 볼 징조라는 말을 하는데, 진지한 표정이었다. 원래 풍수에 밝다는 임난수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정온도
“그렇다면 좋은 일이지요.”

기분 좋은 일이라며 담소를 계속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자, 정온은 아쉬움을 남기고 진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세월과 역사가 흘러,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독립투사들의 투쟁으로 해방을 맞이했으나, 기뻐하는 것도 잠깐, 동족상잔의 전쟁까지 치루고, 민주국가를 만들자며 온 국민들이 노력하는 1999년 12월의 일이었다.

어려서 일본에 건너가, 재력가가 되자, 조국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동포 한 분이, 대전의 어느 대학에 들려, 대학의 발전을 상의를 마친 뒤에

“근처에 오산이 있다는데, 아시는지요?”
라고 물었다. 전날 밤 꿈에, 조상이라는 분이 나타나, 오산을 찾아보라는 말을 했단다. 그러며 가문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떠나는데, 정온의 후손은 일본으로 건너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해야만 했기에  ‘오산’으로 개명했다 한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대학 총장이 신기한 일이라며, 지리에 밝은 교수를 통해, 연기면 양화리에 오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임난수의 붕우였던 정온의 후손, 일본에서는 오야마(五山)로 불린다는 동포는 즉시 그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데도 산속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걸어도 힘들지 않은 것이, 오산의 정기가 가문에 계승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라는 말을 하며 웃는데,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아이의 표정이었다.

그 후에도 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일본에서는 오산으로 불린다는 동포는, 오산을 둘러본 다음에, 숭모각과 독락정에 들려, 조상의 붕우였다는 임난수 장군의 은덕을 기렸다. 그러면서
“이런 인연이 있어 ‘망향의 동산’에 묻히기로 결심한 모양이야.”

라는 말을 하는데 ‘망향의 동산’은 정온의 후손으로 일본에서는 오산(五山:大山)으로 불린다는 정환기씨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민족적 차별을 받으며 사는 재일동포들의 가절한 희망은 죽어서 조국에 묻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안 오산은,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대통령까지 찾아다니는 노력을 하여, 1976년에 ‘망향의 동산’이라는 국립묘원을 조성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고 지금은 오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안의 망향의 동산에 묻혀, 오산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사의 인연이 참으로 숭고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권오엽 명예교수의 상상력이 글속에 들어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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