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오가낭뜰 근린공원의 산신’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권오엽 충남대 명예교수.

범직이천을 따라 오르다 오가낭뜰이라는, 향수에 젖게 하는 이름을 가진 근린공원에 이르면, 잘 정리된 운동기구들이 지나는 객을 유혹한다. 그 유혹에 이끌려 기구에 올라타려는데,

“이리 와서 내 말 좀 들어보시게.”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 같아 둘러보는데, 언덕의 숲이 바람에 흔들리더니 
 
“나는 오가낭이라는 신이라네, 300년을 살았기 때문에, 곧 조상들이 가신 세계로 가야 하는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네.”

라는 말이 들려오더니, 계속해서

그러니까,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이 서울을 지킬 테니 안심하라는 방송을 했고 국민들은 그 말을 찰떡 같이 믿었다

그때 16세의 현수는 서울의 마포에 살았는데, 현수네 가족도 그 약속을 믿고 피난하지 않기로 했다. 6월 28일 새벽에 심한 폭발소리가 들렸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대통령은 이미 피난을 갔는데, 적군의 추격을 막는다며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한다.

그런데도 현수는 동네 아이들과 뒷산에 올라, 한강 건너에 있는 군인과 나룻배로 건너간 북한군이 총질하는 것을 보면서 놀았다. 그러는 사이 서울이 점령당하여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숨어 살았는데, 부산까지 밀려갔던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다는 소문이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남으로 피난가야 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리고 남자들이 서울에 남아 있으면 북한군에 끌려갈 수 있다며,

“청년들은 다 모여라.”

는 정부의 소집령이 내렸다. 현수는 소년이라고도 청년이라고도 말 할 수 없는 애매한 나이였으나, 나라의 말은 들어야 한다며, 이불을 짊어지고 덕수궁 앞으로 갔더니

“여러분은 오늘부터 청년방위군이다.”

영문도 모르는 말을 들려주더니, 그곳에 모인 남자들을 이끌고 청량리, 덕소를 거쳐 양평, 음성, 충주, 수안보를 지나는데, 어찌나 많은 눈이 내리는지 걷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다가 어두워지면 이불을 펴고 자다가 눈을 뜨면 다시 걷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참다못해 묻기라도 하면, 책임자라는 사람은 총개머리를 사정없이 휘두를 뿐, 행선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면 질질 끌고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앞사람 뒤통수만 바라보며 상주, 마산을 거쳐 통영에 이르렀는데, 그 때는 득실거리는 이 때문에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옷을 벗어 털기라도 하면 하얀 이가 하얀 눈 위에 떨어져 기어 다녔다.

덕수궁을 떠난 지 12일 만에 1500리 길을 걸어 통영에 이르렀으나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아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통영에서는 학교의 교실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밥 때가 되면, 왼손에 주먹밥을, 오른 손에는 김치조각을 올려주는데, 그것이 꿀맛이라, 조금만 더 달라고는 사정하는 자도 있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청년방위군이라면서 하는 일도 없이 지내다 가끔 죽창을 들고 제식 훈련을 받는데, 옷이나 신발도 주지 않아, 거리에 나가 훔치는 자도 있었다.

“도대체 나라가 국민을 끌어다 어쩌자는 거야.”

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으나,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내자 마산, 목포, 군산을 거쳐 청주로 끌고 갔는데, 그곳에서는 군대의 보호를 받아, 밥도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천국이었다. 주말에는 무심천에 나가 빨래하는 처녀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도 하는 일 없이 1년 정도 지내다 18살이 되는 해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차비를 주지 않아, 군용 트럭을 훔쳐 타며, 집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며 찾아갔으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집 담벼락에 숯 검뎅이로 쓴

“충청남도 예산군 신월리로 간다.”

라는 낙서가 보일 뿐이었다. 오랜만의 귀가였으나 쉬지도 못하고, 다시 군용 트럭을 훔쳐 타며 물어서 갔더니, 가족들은 다 쓰러져가는 수용소의 땅바닥에 멍석을 깔고 앉아있는데, 아버지도 거지, 어머니도 거지, 동생들도 거지였다.

물론 찾아간 현수도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였다. 너무나 기막힌 가족 상봉이었으나 울 힘도 없었다.

그곳에서 밥을 빌어먹으며 1년을 살다 서울로 돌아갔더니, 이번에는 마룻바닥 종이 조각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집어 보았더니 소집영장이었다. 2년을 청년방위군으로 끌려 다니고, 거지로 1년을 살다 돌아온 현수에게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온 것이다.

“내가 군대에 가면 가족들은 어떻게 사나!”

라는 걱정이 앞섰으나, 입대가 곧 애국이라는 현수는 논산 훈련소로 가서 5년이나 군인 생활을 하더니, 85세가 된 지금도 국민의 의무라면 마다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라를 원망하는 소리라도 할 텐데, 그러기는커녕, 청년방위군에 끌려간 바람에 무심천에서 만난 낭자와 가정을 이룰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한 번은

“국가가 국민을 버려도, 국민은 국가를 사랑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하는데, 300년을 살면서 그렇게 감동적인 말을 들은 일이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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