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 살리라…‘시루봉 ’ - 맑은뜰 근린공원

▲권오엽 명예교수.
▲권오엽 명예교수.

제천과 방축천이 만나서 금강으로 흘러가는 들판에 야산 하나가 있다.
동서남북 사방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아끼기 때문에 ‘공동산’이라고 불렀다.

봄에는 진달래 꺾는 총각과 쑥캐는 낭자의 웃음소리
여름의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가재새끼들이 몰려든다  
가을에 노랗게 물든 들판으로 모이는 총각과 처녀들
겨울의 화롯불처럼 총각들을 애태우는 낭자들의 미소

사람들은 모이면 사철가를 부르며 노는데, 같이 노래하다 보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쉽게 친해져, 조그만 일에도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래서 그런지 공동산을 둘러싼 마을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었고,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공동산에 모여서 잔치를 벌렸다.

동촌 마을 총각이 남촌 마을의 처자를 힐끔보네
서촌 마을 처녀가 북촌 마을의 총각을 흘겨보네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 어울려야 짝을 이루지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어울려야 짝을 이루지

풍년을 축하하고 내년의 풍년을 빌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는 것은 총각들의 씨름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승하는 총각은 원하는 낭자에게 장가들 수 있어, 총각들만이 아니라 딸을 가진 부모들도 관심이 컸다.

“서촌에 사는 진무가 우승할 거야.”

3년 전부터 사람들은 진무가 우승할 것으로 믿었다. 진무는 힘이 세고 기술이 뛰어나 당할 자가 없었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씨름판에 나섰는데도 우승하지 못했다. 예선에서는 쉽게 이기는데, 결승에서 지고 말았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애석하다며 혀를 찼으나 본인은 기뻐했다. 사람들은 지고도 기뻐하는 진무를 비웃었으나, 그러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3년 전에 꽃구경에 나섰던 진무가 쑥을 캐는 소녀 도화를 보자마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도화가 아직 어려, 혼인할 수 있는 16살이 되는 것을 기다리느라, 일부러 져주었던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도화가 열여섯 살이 되자, 진무는 꼭 이기겠다는 생각을 하고 대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만나는 상대마다 밀어붙이고 끌어당기고, 집어 던지다 보니 우승이었다.

“와아! 와아!와아!”

구경하던 처녀들은 물론 출가시킬 딸을 둔 부모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그러자 진무는 상으로 받은 황소를 끌고 도화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도화 낭자와 혼인하고 싶습니다.”

혼인을 신청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을 사람들이 또 한 번 환호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이 진무, 네가 시름은 잘해도 팔씨름은 나한테 안 될걸.”

진무에게 팔씨름을 도전하는 자가 있었다.

모두가 놀라서 바라보았더니, 약골 중에 약골로 소문난 남촌 마을의 연걸이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연걸이 희고 가느다란 팔뚝을 들어 올리며 팔씨름을 해보자고 외친 것이다.

“정신 나간 것 아냐,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하지?”

모두가 연걸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그런데도 연걸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고, 깊고 얕은 것은 건너봐야 아는 법.”

진무에게 다가가며 팔을 걷어붙이는데, 진짜로 가느다랗고 허여멀건 팔이었다.

“그런 가냘픈 팔로 되겠냐.”

진무가 웃으며 팔을 들어 올리는데, 우람한 팔뚝에 파란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그런 팔을 보고도 연걸은 기죽는 일 없이, 오른 팔을 위로 올리며 쫙 편 손바닥으로 좌우로 세 번 비틀어 짠 다음에

“야아아아앗”

하고 긴 기합을 질러대더니, 진무의 묵직한 손목에 두 개의 손가락 댔다. 그리고 앞으로 밀었다 놓았다 하는데, 어찌 된 일인가? 진무의 우람한 팔목이 좌우로 흔들거렸다. 연걸의 팔은 힘이 빠져나간 듯 진무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흔들거렸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야.”

구경하던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연걸은 어려서부터 남몰래 도술을 닦고 있었는데, 자랑을 하지 않아 아무도 몰랐고, 오늘 그 도술을 부린 것이다.

“저는 도화 낭자의 쌍둥이 동생 도리에게 장가들고 싶습니다.”

팔씨름에 이긴 연걸이, 조금 전에 진무가 한 것처럼, 도화 아버지에게 다가가, 도화의 쌍둥이 동생 도리에게 장가들고 싶다는 말을 말했다.

“올해는 경사가 겹치는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쌍둥이 자매의 혼인을 축하한다며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공동산을 씨름하는 산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씨름봉, 시름봉 등으로 불리다 나중에는 ‘시루봉’으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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