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건 아마 이 슬픔도 언젠가는 잊힐 것이니, 굳이 반추하여 견고한 기억으로 남길 필요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제. 기러나 세월이 흘러서도 내는 그날 밤 느꼈던 쓸쓸함과 두려움을 되풀이해서 겪어야 했고, 그 탓에 기억은 견고해졌제. 기런 순간은 언제나 불현 듯 찾아왔제.”

“…”
“어느 날 무심코 집안 구석에 버려진 낡은 목장갑을 발견했을 때처럼. 그 목장갑에도 집게손가락이 없었제. 기러면 집게손가락 없는 목장갑을 끼고 다니던 아베가 떠오르게 마련이었고, 뒤이어 여지없이 그날 밤 동생들과 마루 끝에 앉아 부모를 기다리던 어린 나를 보게 마련이었제.”

“그이의 아마 한쪽 팔을 잃은 누군가를 안다면?”
“한쪽 소매가 없는 셔츠를 볼 때마다 이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을게고마.”
“…”
“기 이후로 내는 농기구를 챙겨 새벽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마저 예사롭게 볼 수 없었제.”
“…”
“아버지의 등에 새겨진 침묵을 해석하려 애써야 했고마.”

아버지는 이전과 분명히 다른 존재였으나 어떻게 달라졌는지 분명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했다.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그의 시,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이처럼 문득 찾아오는 기억을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이라고 불렀다. 내가 눈을 감아도 기억은 눈을 뜬 채 내를 따라온다. 봉준이 아버지 역시 그랬던 것이다.

한 번 지나간 순간은 재현할 수 없지만 앞에 놓인 무수한 시간들 안에서, 그 순간은 수많은 변형태로 돌연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한 번 구겨진 것은 아무리 반듯이 펴도, 잔금 하나 없던 매끈한 은박지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참혹했던 순간의 변주에 불과한, 영원히 고통스러운 순간을 매번 맏딱드리게 될 거라는 사실을…

그리고 읍내 의료원 7호실 301호에서 쓸쓸히 엎드린 채 앓다 가신 아버지.
“말기 암 선고를 받고도 ‘괜찮다, 내사 마 살 만큼 살았데이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제.”
“…”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 이었다.

“오래전 내 꿈은 농민이었고마.”
“…”
“이십대 후반까지만 해도 누군가 내게 꿈이 뭐냐 물으면, 농민이 되는 것이라고 답했잖노.”
“…”
“농민의 삶이 얼마나 각다분한지 몰라서 그랬던 건 아이다.”
“…농촌을 전원으로 착각했던 것도 아니고?”

어느 모로 따져보아도 농민이 된다는 건 그럴듯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꿈이란 게 어디 논리적이기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봉준이가 이렇게 대답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농촌에서 사는 건 희망이 없다는 단순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들은 건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 봉준이에게 나는 소설가가 된 뒤로는 새로운 형태의 충고를 하기도 했다. 농촌을 배경으로 삼은 단편소설을 몇 편 발표했다. 그랬더니 나를 잘 아는 봉준이가 조심스럽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농촌작가로 한 번 인식되면 앞으로 소설 못 쓰고마!”
“무슨 말이야?”
“농촌소설 쓰다가는 소설가 인생도 끝장이고마!”

다 옳은 말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더 말하지만, 꿈이란 게 어디 논리적이기만 할 수 있겠어.”
“내는 오랜 세월 농민이 되기를 열망해왔제, 기 열망은 단숨에 만들어진 것이 아이었고마.”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 눈을 비비며 나서야 하는 길은 얼마나 고되었던가. 이슬이 맺힌 풀들을 헤치며 걷노라면 바짓가랑이가 축축이 젖게 마련이었고, 웃자란 풀들의 날선 이파리에 베이고 긁혀 팔뚝에는 자잘한 상처가 생겨나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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