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말기, 해방 직후, 한국전쟁, 권위주의 정부시대를 겪었다. 한국사 교육의 큰 줄기 가운데 하나가 단일민족론이다. 적어도 제도권 교육에서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한반도 거주자의 역사가 한의 혈통과 문화로 면면하다는 사관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우리민족은 한이 많다.”
“고통을 겪고 한이 많은 민족은 이를 인류의 자산으로 만들 수 있어요.”
“사회갈등, 남북문제 모두 정치보다는 함께 감동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난 네가 이런 일을 해줬으면 한다…”

아버지는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위로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자유분방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버지의 글은 지금 읽어도 참신하다. 나는 젊은 시절 세상 모두가 그를 망각했다고 생각했다. 잊혀 진 자의 고독감에 괴로워했던 내가 도달한 것은 잊혀 진다는 것의 본질이었다. 망각은 관계가 소원한 사람들뿐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망각의 극단에 이르면 가장 가깝고, 그래서 가장 사랑하는 형제와 아내마저 자신을 잊게 하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이제 나마저도 나를 잊어야 한다.

내가 나를 잊는 단계로 올라선다면 너와 나의 차별이 극복되고, 모든 존재를 두루 사랑하는 평등의 관계로 비약이 일어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잊혀지는 것이 고독을 벗어나는 길이다.

“아버지, 오늘 하루 어땠어요?”

이 말 한마디면 처진 어깨를 다시 힘껏 펴는 사람, 그게 아버지란 이름의 남자들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삶은 짧고 불운했다.

“니 엄마가 살아 있을 땐 사랑이라면 느낌이 그저 그랬지. 세상을 떠나고 나서보니 사랑이란 게 참 영원한 숙제더구나…”
“…”
“누구나, 다, 자기 혼을 끄집어내서 제대로 한번 사랑해보고 싶은 갈증 같은 게 있어…”
“…”
“인생후반부에 오니까, 혼자 있으니 애절하게 떠오르고 갈구하는 낱말이 결국 사랑인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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