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위험한 비탈에 서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할 정도로 위험한 자세로 서있다.

둔탁한 어둠이 내려앉은 이 밤에, 둔탁한 아버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목련과 벚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 홀로 있던 아버지는 어느 봄밤이 이슥하도록 텔레비전 앞을 지켰을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그 자체가 박탈과 결핍의 과정이야. 지난 100년 동안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조국과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경험을 지나왔어. 삶을 통째로 잃은 이도, 목숨을 잃은 이도 있어.

가난했던 시절 역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며 마음은 여전히 그 상실의 경험에 머물러 있는 듯 보여. 못 받은 사과와 덜 먹은 끼니들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 해.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우리는 결핍의 빈곳을 소중히 간직한 채 박탈의 허공을 디디고 서 있어. 아무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소용없는 일이야.

자본주의는 다시 개인의 결핍감을 자극하며 성장하고 있으므로… 
어떤 이는 모호하게, 어떤 이는 좀 더 명확하게 그 길을 걷지만 최선을 다하기는 마찬가지야. 누구나 출생의 찌꺼기, 태어나기 전에 자신을 품었던 원초적 세계의 끈끈한 막과 알껍데기를 최후까지 갖고 가.

모두 이 뿌리 어머니는 같아. 모두 동일한 구멍에서 나와. 그러나 그 깊은 구멍에서 나온 실험이자, 자녀에 의해 던져진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목표만을 추구해. 서로를 이해 할 수 있지만 자신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야.

모계 사회적 구조에서 아버지는 멸종 동물이거나 흔적기관이야. 아버지들은 가부장적 권위만 내세우다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왕따 당하고 집 밖으로 내몰리는 무력한 존재야. 아버지는 가장의 책임을 완수하려고 직장에서 크고 작은 굴욕을 견뎌. 대화가 필요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하려면 아버지 나이가 되어야만 해.

아버지는 “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고 이야기했어.

아버지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런 생각에 도달했지만, 난 아직도 아이를 품지 않아서 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지금도 나는 결혼하고 애를 낳아서 기를 수 있기를 희망해. 난, 사람과 사람은 수천 년이 떨어져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세상에 소통이 안 된다고 하지만 해방 전후를 몰라서 하는 이야기일 거야. 그때는 ‘상대를 죽였다’고 한다. ‘죽이면 해결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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