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강대국 사이에서 짓눌리고 핍박받는 과정에서 중립(中立)의 이상을 꿈꿔왔으며, 국민 감시체제를 휘두른 군부독재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았고, 정파간 파벌싸움에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선거에 패배하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목도했다.

그때도 그랬다. 옛날 옛날,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북쪽나라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남쪽 나라가 있었지. 오랫동안 두 나라는 한 나라였어.

북쪽 나라엔 남쪽 나라 순희의 외할아버지가 살았고, 남쪽 나라엔 북쪽 나라 철수와 고모할머니가 살고계시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나라는 둘로 나뉘어 서로 미워하게 되었지. 끝. 그리고 끝없는 시작. 처음과 끝이 없는 세계.

“마쳤도다!”라고 말하고 죽은자로 묵시되는 인간의 종말.

과연 이런 상황에 인간을 위임할 수 있습니까? 끝. 그리고 절망에 의한 희망. 당신은 이런 종말론적인 이미지에 친숙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마도 북극의 오로라 이외에는, 그리고 방금 차에 치어 죽은 자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은 지구 위에서 종말론적인 분위기로 발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남쪽 나라는 힘센 이웃 나라와 함께 매년 북쪽 나라를 제압하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고, 북쪽 나라는 자신의 털끝 하나라도 건들면 자폭하겠다고 폭탄을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곳을 여행했습니다. 헐벗은 북한도 다녀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곳이 발광한 기행문을 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행문을 쓰는 것보다 나의 망명을 택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거대한 사회적 기계화 시스템에 완전히 삶의 주체감을 박탈당하고 그런 체제로부터 나는 발광하거나 파멸하고 있습니다. 그런 체제에 대해서 굴복한 자도 끝내 박제된 모습으로서 움직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아아, 인간이여! 인간이 지난 시대를 향수로 외치는 자도 있습니다. “너와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는 자도 있습니다. 절망이 그들의 전부인 것입니다. 절망!

그러나 절망은 궁극적으로 희망의 이론입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에 의해서 최근 희망이라는 것을 관(冠)으로 씌운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에른스트·브르흐의 ‘희망의 원리’와 율겐·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그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사에 있어서의 절망과 희망 중에서 택일하여 희망에 환원하는 최후적인 풍경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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