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聖誕)은 새 기원(祈願)이다.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부의장
▲강용수 전 세종시의회부의장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 때는 정치적으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다. 로마는 오로지 힘의 논리로 통치했다. 힘이 곧 정의였다. 힘으로 정복하여 힘으로 노예를 삼아 힘으로 그들의 주인이 되었다.

사상은 헬레니즘(hellenism)이다. 헬라철학의 특징은 이분법(二分法)이다. 인간의 육신은 악(惡)이다.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살다보니 마음껏 쾌락(快樂)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영혼은 고결(高潔)하다. 영혼의 구원은 신을 아는 지식(智識)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공동체인 히브리인들은 로마의 정책(政策)을 따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 공동체의 유일신인 야훼(yahwh)만을 믿었다. 그들에게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종교생활이었다. 율법을 얼마나 철저히 지키느냐가 그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때 30대 젊은 예수라는 이름의 청년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주 생경(生硬)스러운 주장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을 가르쳤다. 동시에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자의 아버지시며, 그 아버지는 사랑이시라고 외쳤다. 사람들은 청년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믿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수 청년이 여러 가지 하나님의 아들만 가능한 표적(標的)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을 먹이고도 남기셨다. 당시 나병환자도 고치셨고, 베데스다의 연못에서 38년이나 누워있던 환자도 걸어가게 하셨다. 심지어는 노한 바다도 말씀만으로 잔잔하게 하셨다.

그가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길과 하나님의 아들이 살아가는 삶의 법칙(法則)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되는 방법은 간단했다.

믿으면 된다고 하셨다. 믿는다는 말은 ‘영접(迎接)’을 의미한다. 영접이란, 모셔드림이다. 누구를 모셔드리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마음에 모셔드리면 된다고 했다. 정당한 논리(論理)였다.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들을 자기 자녀로 삼고 싶어 하심이다.

모두가 죄를 범하고, 의롭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음을 하나님 스스로 안타깝게 여기시고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대신 받게 하셨다.

그러므로 죄 없는 청년 예수가 십자가에서 억울하게 죽으셨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처형을 당(當)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십자가 죽음을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만 믿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드려지는 은혜를 베푼 것이다.

진리가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은 이 진리를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또한 인간이 신의 아들이 되었는데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방법론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지나친 이상론이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법칙이 삶의 진리이다.

유목생활(遊牧生活)에 있어서 부족(部族)과 부족의 다툼도 많았을 것이다. 자기 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복수하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징벌(懲罰)적 법률을 적용하지 아니하고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社會)였다.

그런데 이런 문화에서 원수가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을 돌려서 대라는 가르침을 과연 누가 실천할 수 있을까? 그 시대에 어느 부족이나 국가도 받아드릴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예수 청년은 자기의 가르침이 바로 진정한 유대교의 율법정신의 뿌리라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론(理想論)적 논리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기소개는 결국 불경죄(不敬罪)에 해당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고,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의 재판에 의해 사형집행(死刑執行)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 아니었다.
십자가에서 죽은 청년 예수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증인(證人)들이 계속 늘어나고 예수 청년의 가르침은 점점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십자가에 달린 극한 상황에서 자기를 향하여 창으로 찌르고, 대못을 박은 사람들을 용서했던 예수님이셨기에, 당시와는 전혀 맞지 않던 진리가 진정한 진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주(主)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예수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는 노예들의 관리였다. 그런데 로마의 노예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을 동물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주인들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는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신혁명이었다 .

사랑이란 비현실적이며, 이상적 주제로만 알았던 ‘사랑’이 실제가 되었고 인류의 진리가 되어 정신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결국 이 진리는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되어 국가 자체가 기독교가 되었다. 또한 인류 사회에 참 진리가 되었다.

인간의 정신이 새로워진 것은 인류 기원(祈願)의 새로워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성탄(聖誕)은 인류의 새 기원(祈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2016년도의 성탄절(聖誕節)을 맞고 있다.
이번 성탄(聖誕)으로 위기(危機)가 기회(機會)가 되는 하나님의 역사(歷史)가 이 땅에 나타나길 간절히 기원(祈願)해본다.

즉, 로마에서 불같이 일어났던 정신혁명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임하기를 기원해본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부끄럽게 하는 더럽고 추악한 것들은 벗어 버리고 이 땅에 성령이 충만하기를 기원해 본다. 더불어 새해에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해본다.

며칠 전 어느 기독교방송 세종시운영이사회 창립기념 성탄축하음악회(聖誕祝賀音樂會)가 조치원 소재의 거룩한 장소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번 공연에 국내 최정상의 CCM 가수인 동방현주가 부른 사명(使命)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매우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감동의 시간을 만들기에 충분(充分)했다.

사명(使命)의 노래 가사(歌詞)와 함께 우리 모두 성탄의 기쁨을 누려 봄은 어떨까.

(1절) “주님이 홀로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3절)까지 이어지는 찬양에 전율을 느끼지 못한 자 누가 있을까!

잠시 하늘을 향하여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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