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나는 무슨 깨달음을 얻은 걸까요? 나의 허벅지에서 생을 보존한 내가 그녀에게는 연꽃이었나 봅니다. 나는 최고의 권력자 그녀는 나에게는 낯설기만 한 모성을 일깨워 준 독특한 여자였으니까요.

자애롭고 깊은 사랑의 손에 이끌려 서로 쓰다듬고 다독이는 삶을 배워야 할 시기에 엄마를 빼앗기고 엄마 노릇을 하는 사람이 공격해대는 그런 삶이 허방을 만나 피를 철철 흘려야 했으니, 자기 십자가에 끌려 다니며 미친 채로 방랑해야 했던 내가 그 고통 속에서 본 것은 일자(一者)였습니다.

이미 오래전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최종심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했어. 그렇다면 오지 않는 최종심의 순간을 위해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 봐. 가자!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 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야. 그리하여 나는 기다리기로 결심해야 돼.

시간에 이기는 방법은 그저 시간을 견디는 것일 뿐! 그러나 숨죽인 기다림을 넘어서는 의지적 낙관으로! 당신 때문에 눕고 일어나고, 당신 때문에 절망하고 희망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전부인! 하여 기다릴 수밖에 없는 다혜. 다시 기다리기 위해 우물우물 밥알을 삼키는 슬픔의 풍경, 백지처럼 정갈하고, 아리고, 아프게 해. 네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단 한 순간도 망설임 없이 대답해줘도 너에게 닿는데 시간이 걸려.

또 거기에 대한 너의 대답이 돌아오는데 시간이 더 걸리는 지금의 이 거리를 둬. 내가 가장 숨 막히는 게 무언지 아니? 그건 대답이 돌아오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데서 오는 갑갑함이야. 나는 고백해. 소설을 쓰는 일도 실연의 고통을 잊고, 다시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어리석은 연인들과 닮았어.

나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로 불리고 싶었어. 인간이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냈어. 어린이들이 스스로 강낭콩을 화분에 심어 키워 보면서 식물이 자라는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관찰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싶었어.

나는 메마른 씨앗에서 새싹이 움트고, 또 꽃이 활짝 피며, 나아가 열매까지 맺는 과정을 이루고 싶었어. 씨앗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소중함. 숨어있는 지도 이해할 수 있기를, 그 속에서도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했어.

문필가인 내가 함께한 이야기를 풀어내겠어. 우리는 똑 같은 인간이야. 초연함과 연민 사이에서 그리고 희망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나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것, 이라고 나는 소개하겠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야기가 담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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